‘눈 딱 감고 한 발작만 앞으로 더!’

[시사매거진 242호=이관우] 국제구호활동가이자 전 월드비전 긴급구호팀의 팀장인 한비야(韓飛野·60)가 대중에 알려지게 된 계기는 <바람의 딸, 걸어서 지구 세 바퀴 반>이라는 도서를 통해서다. 1996년경이니 벌써 22년 전의 일이다. 당시는 아프리카, 중동, 중앙아시아를 비롯해 중앙아메리카, 남아메리카, 알래스카 그리고 인도차이나 반도, 남아시아, 몽골, 중국, 티베트 등을 배낭 하나만 메고 6년간 60여 개국을 탐험한 여행가로 소개되었다. 그러나 지금은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국제구호활동가이자, 현직 구호활동가를 재교육함은 물론, 월드비전 세계시민학교를 운영하는 교장으로 자리매김 되고 있다. 그런 그녀가 2005년 <지도 밖으로 행군하라>를 펴낸 후, 강연 활동을 펼치며 대중과 소통을 꿈꾸고 있다.

세계 60여 개국 여행가 ‘작가 한비야’

1996년 <바람의 딸, 우리 땅에 서다>와 <바람의 딸, 걸어서 지구 세 바퀴 반> <한비야의 중국견문록> <지도 밖으로 행군하라> <그건, 사랑이었네> 등 총 8권의 책을 펴낸 한비야는 자신이 직접 경험하고 체득한 바를 에세이로 풀어내며 자신을 알리기 시작했다. 국내 여행뿐 아니라 세계 각지를 탐험하며 무한한 인류애를 몸소 실천하고 있는 그녀는, 자신의 유년시절 이야기로 특별한 세계 일주 여행의 포문을 연다.

“열 살 때 아버지가 구해오신 세계지도를 보며 세상 일주를 꿈꾸었다. 우리나라는 베이스캠프고, 나의 무대는 전 세계다. 당시만 해도 먼 나라 이야기에 불과한 여행을 33세 때 실행했다. 직장을 그만두고, 국민연금도 해약하고, 세계여행을 시작한 것이다. 여러 나라를 배낭만 메고 육로로 다니는 것이 좋았다. 그것도 걸어서 산간벽지 사람의 발걸음이 드문 곳으로 가는 것이 흥미로웠다. 재력이 아니라 체력에 의지해서 혼자 떠난 시간이었다. 당시는 같이 갈 사람이 없었고, 소통할 대상이 없었다. 두 발로 걷는 여행은 험난하기 그지없다. 그래도 그 미지의 세계가 가슴을 뛰게 했다.”

한비야가 처음으로 배낭을 메고 세계여행을 시작한 것은, 1986년 홍익대 영문학과를 졸업한 후, 1989년 미국 유타 주에 있는 유타대학 대학원에서 국제홍보학 석사과정을 공부할 즈음이었다. 지난하기 그지없는 대학원 공부를 마치면 재충전의 기회로 반드시 국내외 명산을 오르리란 결심을 굳혔다. 드디어 1997년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걸어서 세계 일주를 하겠노라 통보했다. 어머니를 제외한 모든 가족이 반대했다. 그래도 씩씩하게 세웠던 계획과 일정에 맞춰 강행군을 시작했다.

“막상 산간벽지 궁벽한 곳으로 여행을 떠나보니, 세상은 너무도 달랐다. 먹을 만한 음식이 없어서 3초에 1명씩 죽어가는 현장과 직면했다. 태어나면서부터 모유를 제대로 먹지 못한 어린이가 영양실조에 걸려 있었다. 이어 면역력이 약해져 많은 질병이 그들을 지배하고 있었다. 인간에 대한 연민의 정이 가슴을 아프게 했다.”

그녀가 목격한 빈곤 현장의 어린이는 4가지 원인으로 죽음을 맞이하고 있었다. 그중 첫째가 설사다. 더러운 물을 먹은 어린이는 고열에 시달리다가 탈수가 되어 죽어가고 있었다. 선진국에서 1달러짜리 링거 한 병이면 살릴 수 있는 탈수병이 그곳에서는 죽음에 이르는 병이었다. 그리고 둘째는 모기로 인해 걸리는 말라리아가 문제였다. 이것도 1달러짜리 모기장 하나면 해결된다. 셋째 홍역이다. 면역력이 없는 어린이가 그대로 죽어가는 현장에서 1달러짜리 하나면, 영양제를 공급해줄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국제구호활동가 & 월드비전 긴급구호팀 ‘한비야 팀장’

세계 여행에서 돌아온 후 무거운 마음을 가지고 ‘어떻게 하면 죽어가는 아이들을 살릴 수 있을까’ 고민을 많이 했다. 그리고 그러한 구호활동에 헌신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그러던 차에 월드비전 측에서 연락이 왔다. 이로써 한비야는 2001년 10월부터 위촉돼 9년 동안 국제구호개발기구 월드비전 긴급구호팀에서 팀장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

“자원해서 NGO 활동에 들어간다고 했을 때 역시 모두 만류했다. 세계 일주 이후 또 다시 위험한 일을 불사한다고 걱정이 이만저만 아니었다. 무엇보다 구호를 위한 자금을 모금하는 것이 쉽지 않을 텐데, 발 벗고 나서는 모습에 염려를 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말을 빨리 한다’는 특성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매우 다급한 사정인 줄 알고 적극적으로 도와주었다. 그래서 여러 모로 많은 도움을 받았다.”

이후 한비야는 초반에 아프리카와 중동 등지에서 일하다가, 2012년부터는 ‘인도적 지원 전문가(Humanitarian Assistant Specialist)’로 일하며 더 많은 지역을 왕래하게 된다. 또한 2011년부터는 UN 중앙긴급대응기금 자문위원으로 남수단과 서아프리카 말리에서 활동하는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월드비전 로고가 새겨진 깃발이 현장에서 보이면 생명줄을 잡은 것과 같다. 남자는 잡아가고, 여자는 폭행을 당하는 분쟁지역 시리아 알레포를 탈출해서 국경을 넘었을 경우, UN 깃발이나 적십자기, 월드비전 깃발과 NGO 깃발 아래 서면, 국제법에 의해 국제난민으로 분류되어 보호를 받을 수 있다. 그 지역에서 물과 식량, 보건의료와 피난처를 제공받으며 생명을 안전하게 확보할 수 있다.”

그런 그녀가 구호활동을 전개하며 여러 분쟁지역에 갔을 때는 곧잘 어려운 일에 직면하기 일쑤다. 구호식량을 주려고 아프가니스탄 비행장에 갔을 때는, 그 일대가 지뢰밭이었다. 지뢰는 30kg이나 50kg의 무게가 얹히면 터지는 발목지뢰를 비롯해, 차량이 지나가면 터지는 대전차지뢰가 매설돼 있었다. 이런 곳을 통과하며 식량을 원조하는 일은, 소리 없는 사투기도 했다.

또한 인도네시아에 쓰나미가 급습했을 때도, 하루에 수백 명씩 죽어가는 현장을 목격해야 했다. 7m가 넘는 파도가 시속 240km 속도로 밀려와 바닷가 가난한 사람들을 휩쓸었다. 하루에 20만 명이 죽어나갔다. 뿐만 아니라 40도를 웃도는 살인적인 열기에서 매일 물에 빠져 죽은 시신의 부패 과정을 봐야했는데, 3일째 되는 날은 시신이 악화되어 냄새가 진동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1주일이 지나면 현지 군인이나 경찰이 파란 자루에 시신을 넣고 공항 근처에 큰 구덩이를 파서 묻는다. 2차 전염을 방지하기 위해서다. 무엇보다 시신이 썩는 냄새에 트라우마가 생기게 한다.

한비야는 “처참한 구호현장을 다녀오고 난 후 병원에서 트라우마 치료를 받아야 하는데 너무 바빠서 시기를 놓쳤다. 그래서 아직까지도 죽음과 냄새에 대한 고통에 시달리지만,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데에 있어 값비싼 수업료를 지불하고 있다고 생각하며 버텨내려고 노력한다. 인간이 살아가면서 어떻게 좋은 일, 행복한 일만 있겠는가. 남을 돕고 구호하는 활동에도 모두 치러야할 값이 있다고 여기며 극복해나가려 한다”고 밝힌다.

월드비전 세계시민학교 ‘한비야 교장’

한국에서는 작가, 교장, 박사 등 여러 직함으로 불리지만, 그래도 한비야가 가장 의미 있게 여기는 일은 월드비전에 들어가 구호활동을 펼치는 일이다. 그중에도 세계시민학교에서 어린이들을 지도하는 교장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는 데, 가장 큰 인생의 보람을 느낀다. 무한한 인류애를 품고 생명을 구하는 일은, 그의 가슴을 박동하게 한다.

2011년 9월부터 UN 중앙긴급대응기금 자문위원을 맡은 동시에 한국국제협력단 자문위원으로 위촉되었다. 이어 같은 해 12월에는 월드비전 세계시민학교 교장이 되었다. 벌써 7년의 시간이 흘렀다.

한비야는 “이렇게 구호활동을 한다는 것은 내 인생의 최고 행운이다. 내 기질에 가장 잘 맞고, 나의 빠른 어투로 전달해서 현장에 모금한 자금을 전달할 수 있는 것은, 삶의 크나큰 보람이다. 많은 어려움과 고비가 존재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일을 할 수 있는 것은, 또한 이 일이 내 가슴을 뛰게 하고, 내 피를 끓게 하는 것은 가장 인간다운 일을 하고 있다는 자부심에서다. 나는 이 일을 하면서 죽는 것이 소원이다”고 피력한다.

이어 그녀는 “나는 현재 세계시민학교 교장을 맡고 있다. 교육청 관계자를 만나야 하는데, 훌륭한 사람들도 많지만, 단 1분도 같이 있고 싶지 않은 사람도 있다. 그러나 세계시민학교 일이 잘 되게끔 하기 위해서는 이런 사람 저런 사람 모두 만난다. 개개인이 다 어떤 역할로든 필요하다. 또한 이 일이 될까 안 될까 걱정스러울 때가 많다. 세계시민학교 개설 역시 말리는 사람들이 있었다. 나 역시 ‘할까 말까, 하다가 실패하면 어떻게 하나, 하다가 잘 못 되면 어떻게 하나’는 우려가 자주 든다. 그럴 때마다 ‘눈 딱 감고 한 발작만 앞으로 더!’라는 외친다. 내면을 향한 그 소리 덕분에 현재까지 추진해올 수 있었다”고 들려준다.

한비야에 의하면, ‘용기’란 주는 것도 아니고 받는 것도 아니라고 한다. 용기는 그야 말로 보태는 것이란 지론이다. 할까 말까 50:50으로 분분할 때 보태서 결정할 수 있게 하는 것이 바로 ‘용기’다. 지금 무엇인가 망설이고 있다면, 오랫동안 하고 싶었던 것이 있다면, ‘눈 딱 감고 한 발짝 들어서면 된다.’ 마치 성서 인물인 모세가 홍해를 건널 때도 한 발짝을 들여놓았던 것처럼. 또한 자기 자신에게도 용기를 얻게끔 스스로 위로를 해줘야 한다. “나는 내가 맘에 들어, 내가 참 맘에 들어. 그동안 수고했어. 앞으로도 잘 부탁해”라고 해야 한다는 지론이다. 우리 스스로에게 머리를 쓰다듬어야 한다.

그러나 그러한 그녀에게도 ‘절대 하지 않는 것’이 있다. 가령 무엇을 살까말까 망설일 때 절대 사지 않는다. 최소한의 물건으로도 얼마든지 살아갈 수 있다. 특히 등산이나 여행을 갈 때 많은 물건들이 어깨를 무겁게 한다는 체득으로 인해, 인생이든 여행이든 가볍게 살아야 한다고 결심했다. 그래야 좀 더 자유롭다는 것이다.

반대로 ‘할까 말까 망설일 때 반드시 하는 것’이 3가지 있다. 첫째 남을 도울까 말까 할 때는 절대로 돕는 일에 발 벗고 나선다. 기부든 시간이든 재능으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에 적극 나선다. 둘째는 공부를 할까 말까 할 때 한다는 것이다. 뭔가를 조금이라도 배우면서 살아가는 길을 선택한다. 어제의 나보다 오늘의 내가 나으려면 무엇인가 계속해서 배워야 한다. 셋째 놀까 말까 할 때는 모조건 논다. 가슴이 떨리는 젊은 날 많이 놀아야 한다. 나이 들고 늙으면 다리가 떨려서 힘들다. 그래서 한비야는 외친다. 할까 말까 망설일 때, “눈 딱 감고 한 발짝만 앞으로 더!”

 

(글_이관우 소설가 / 사진_최정호 사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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