끌려간 열네 살의 해맑은 소녀, 그 소녀의 삶은 거기서 끝났다.

[시사매거진 243호 =신혜영 기자] ‘위안부 피해자 3명에게 각 30만 엔씩 모두 90만 엔을 지급하라는 원고 판결한다.’ 1998년 일본 사법부가 내린 위안부 관부(關釜)재판의 판결문이다. 비록 일부 승소였고 2심에서 뒤집히긴 했지만 일본 사법부가 처음으로 위안부 피해와 관련해 일본의 책임을 인정했다. 이 사건은 관부재판이라는 실제 이야기를 바탕으로 만든 영화 ‘허스토리’를 통해 대중들에게 알려졌다. 1992년부터 1998년까지 6년이란 긴 시간 동안 일본 사법부와 외롭게 싸워온 위안부 할머니들과 원고단장 문정숙 씨의 이야기를 다룬 이 영화가 위안부 문제에 대해 또 다시 심금을 울리고 있다.

서울시가 지난 3월 1일 3.1절 99주년을 기념해 27일 한·중·일 일본군 위안부 국제컨퍼런스에서 일본군이 조선인 위안부를 학살했음을 보여주는 영상을 최초로 공개했다고 27일 밝혔다. 사진은 1944년 9월 15일 미국 사진병 프랭크 맨워렌(Frank Manwarren) 등충에서 촬영한 조선인 위안부가 학살된 모습. (사진출처_뉴시스)

“세례까지 받은 가톨릭 신자가 깨끗한 입 가지고 더러운 말을 하는 것이 싫어 성당에서 위안부 문제는 이야기하지 않겠다고 맹세까지 했다. 증언이 꺼려지기도 했으나 역사는 살아야겠기에 증언대에 섰다.”

지난 2000년 9월 미국 워싱턴에서 열린 위안부 심포지엄에 참석한 고 김상희 할머니는 증언대에 선 이유를 이렇게 밝히며 가슴 아픈 과거에 대한 증언을 시작했다. 1992년 위안부 피해자 신고를 한 뒤 일본제국주의의 만행을 세계에 널리 알리는 일에 적극 나섰던 김상희 할머니. 그러나 그 한을 채 풀지 못하고 광복절 60주년을 눈앞에 두고 지병이 악화돼 결국 세상을 마감했다.

위안부 문제가 한국사회에서 처음으로 제기된 건 1990년이다. 그 후 1991년 8월 일본군 위안부였던 고 김학순 할머니가 최초로 증언한 뒤 약 200명에 이르는 피해자들이 정부에 신고를 했다. 그 뒤 각 시민단체에서 위안부 할머니들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나섰고, 위안부 할머니들 역시 활발한 증언활동을 통해 위안부 문제를 알리고자 노력했다. 위안부 실상을 알리기 위해 노령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많은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이 목소리를 내고 있다.

*04- 지난 5월 23일 오후 서울 종로구 수송동 구 주한일본대사관 앞에서 열린 제1336차 일본군 성노예제 문제해결을 위한 정기 수요시위에 참석한 학생들이 손피켓을 들고 일본 정부의 사죄를 촉구하는 구호를 외치고 있다. 위안부를 소재로 한 영화가 나오고, 매주 많은 사람들이 수요집회에 참여하는 것은 결코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는 얘기다. 정부가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 (사진출처_뉴시스)

짓밟힌 청춘, 지울 수 없는 상처. 영원히 치유되지 못할 그 이름 ‘일본군 위안부’

‘일본군 위안부’란 일제강점기에 일본군 위안소로 연행되어 강제로 반복해서 성폭행 당한 여성들을 일컫는 말로 한국에서는 오랫동안 ‘정신대’라고 불러왔다. 정신대란 말은 전쟁 노동력으로 동원된 여자에 한해서 쓰이게 된 말로 ‘여자정신근로령’에 의거하여 조직된 여자근로 정신대는 남성들의 전쟁 동원으로 인해 부족해진 노동력을 보완하기 위한 것이었다. ‘정신대(노무동원)’와 ‘위안부(성동원)’ 제도는 다른 것이다.

일본 정부는 일본군들의 성 욕구를 채워주기 위해 위안부 제도를 만들었다.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을 치루는 동안 집단적 성행위 장소인 군대 위안소를 제도화하고 식민지와 점령지에 있는 수많은 젊은 여성들을 강제로 전선으로 수송해 체계적으로 성노예의 역할을 강요했다. 당시 한국에서의 종군위안부 모집은 납치, 사기 등을 통해 강제로 이루어졌으며 납치된 여성들 중 상당수는 15~20세 사이였고 심지어 13살짜리도 있었다.

일본군 위안부로 동원된 여성의 총수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여러 증언 자료에 근거해 최대 40만 명까지 동원됐다는 의견이 제시되고 있다. 그 당시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간 조선인 여성들은 모두 20여만 명으로 추정되며 이들 중 대다수가 사망했다.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의 증언에 따르면 당시 위안부로 동원된 여성들에겐 자유가 없었다. 그야말로 인본군의 만행은 잔혹했다. 일본은 한국, 대만 등지의 여성들을 데려가 산부인과와 같은 곳에서 아이를 갖지 못하도록 수술을 시킨 다음 군수품 마냥 성 노예로서 하루 100명 정도의 남성과 성 관계를 맺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폭행도 서슴지 않았다고 한다.

위안소는 주로 가시철조망에 둘러싸여 있었고 철저하게 차단·감시되었다. 일본군 위안부들에 대한 건강검진은 군의관들이 했으나 이들에 대한 정기검진은 단지 성병 감염을 막기 위한 것이었지만 대다수의 위안부들은 성병에 감염되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군인들이 여성들에게 가하는 담뱃불로 지진 상처, 멍, 총칼에 의한 자상, 부러진 뼈 등에 대해서는 거의 신경을 쓰지 않았다.

“임신한 위안부 여성을 일본군 두 명이 끌고 가더니 두 손과 두 발로 모두 끈으로 묶은 뒤 마취도 하지 않은 채 그 여성의 배에 칼을 꽃아 아이가 죽은 채로 튀어나오게 했다”는 어느 피해 할머니의 증언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일본인들이 저지른 만행은 믿기 어려울 만큼 잔혹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소극적인 한국정부, 안일한 일본정부

피해자 할머니들은 그렇게 오랜 세월 동안 피해 사실을 외쳤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일본정부로부터 공식적인 사과 한마디 받지 못했다. 그렇다면 왜 지금까지 위안부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 있을까?

그동안 한일간의 식민지 지배 배상 요구는 1965년 박정히 집권 당시인 제3공화국에서 이른바 ‘김종필-오하라 각서’와 한일기본조약으로 일단락되었다고 주장되면서 이후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정부의 노력에 계속 커다란 걸림돌로 작용했다. 1990년 5월 ‘일본의 전쟁 책임문제’가 한국 내에서 거론되면서 강제 연행자의 명부 작성을 일본 정부에 협조 요청하였으나 일본 정부는 65년 ‘일한청구권, 경제협력협정’에 이미 모든 보상을 다 끝냈다며 “보상에 대신하는 어떤 조치”를 생각해보겠다고 답했다. 이때 노동성 직업안정국장은 “종군위안부에 대해서는 옛날사람들의 이야기를 종합해보니 민간업자가 그러한 분들을 데리고 있었던 것 같고 그 관계에 대해서는 실정을 밝히지는 못한다”고 대답하며 일본군의 관여를 전면 부정했다.

그러던 중 1991년 12월 도쿄에서 개최된 한일아주국장회의에서 우리나라는 일본에 우선 철저한 진상 규명을 강력히 요구했다. 미국국립문서보관소에서 일본군이 위안부 모집, 수송, 관리 등에 개입한 사실을 입증하는 문서를 발견했고 이 문제에 대한 중요한 자료가 되어 일본을 압박했다. 결국 1992년 1월에 이뤄진 한일정상회담에서 노태우 대통령의 문제 해결을 위한 요청에 따라 일본의 반성과 사과가 있었다. 이어 정부는 ‘정신대문제실무대책반’을 설치했고 계속 협의하며 전국의 시‧군‧구청에 피해자 신고센터를 설치했다.

그 뒤 1998년 5월 김대중 정부는 피해자들에게 한꺼번에 3,150만 원의 생활지원금을 지불했고 위안소에 관련한 일본인에 대한 입국 금지 조치를 내렸다. 그리고 29명의 의원이 모여 ‘일본군위안부 문제 연구모임’을 발족 하는 등 위안부 문제에 대해 노력하기는 했으나 한국 정부와 정치인 어느 누구도 일본 정부를 향해 강력히 사죄와 배상을 요구하지 않고 있는 등 소극적인 태도를 보여 왔다.

박근혜 정부는 일본 측의 피해자 지원금 10억 엔(한화 약 111억 원) 출연을 합의했고 이에대해 “이 문제(위안부)가 최종적 및 불가역적으로 해결될 것임을 확인한다”고 밝혀 논란이 됐다. 당시 박근혜 정부는 협의 과정에서 피해자들의 의견을 충분히 수렴하지 않은 채, 서둘러 정부 입장을 위주로 합의를 매듭지었다. 결과적으로 피해 할머니들로부터 매서운 질타를 받았고, 시민단체 등을 중심으로 협상 결과가 미흡하다는 지적과 함께 한국 정부의 ‘굴욕 외교’이라는 비판이 끊이지 않았다.

그러던 중 최근 일본위안부 피해자 문제 합의 검토 TF 결과 이면합의가 사실로 드러나면서 비판의 목소리가 더욱 높아지고 있다. 비공개 내용에 따르면 일본이 정대협 등 피해자 관련 단체를 특정하면서 한국정부에 설득을 요청했고 이에 한국정부는 ‘관련 단체 설득을 노력’ 하겠다며 일본의 희망을 사실상 수용했다. 또한 일본은 해외에 소녀상, 기림비 등을 설치하는 것을 한국정부가 지원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으려 했고 한국정부는 지원하지 않겠다는 내용을 비공개 부분에 넣는 것에 동의했다. 일본은 한국의 ‘성노예’ 표현을 사용하지 말 것을 권유하고 이에 한국정부는 공식 명칭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문제’ 뿐이라고 했다. 주한일본대사관 앞의 소녀상 이전과 관련해서 한국정부는 적절히 해결되도록 노력한다고 답한 것으로 드러났다.

그러나 여전히 위안부 문제는 답보 상태다. 일본은 지난 2015년 당시 박근혜 정부와 일본정부가 맺은 위안부 합의 태스크포스(TF)로 문제가 종결됐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윤미향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상임대표는 “해방 이후 우리나라의 과거사 정리 문제에 대해서는 새 역사로 가기 위해 반드시 해결할 문제라고 언급하면서, 일본의 과거사에 대해서는 왜 이토록 자세를 낮춰야 하느냐”며 “일본군 만행의 피해자이자 증언자인 위안부 할머니들이 모두 돌아가시기 전에 한국정부는 일본정부와 일본 국왕에게 사죄와 배상을 요구해야 한다”고 말했다.

지난 6월 18일 강경화 외교부장관이 취임 1주년 언론 브리핑에서 “국제사회에서 위안부 문제가 ‘전시 여성 성폭력’이라는 굉장히 심각한 인권문제로서 자리매김할 수 있도록 외교부로서 곧 발표할 계획을 준비하고 있다”고 밝혔다.

강 장관은 일본 정부가 출연한 피해자 지원금 10억 엔을 우리 정부 예산으로 충당키로 한 것과 관련, “기술적인 부분을 풀어나가는 부분이 남아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위안부 합의문제와 관련해서는 10억 엔을 우리 예산으로 만들어낸다는 것, 화해치유재단 향배와 피해자 단체들과 긴밀히 협의를 하겠다는 것에 대해서는 여가부가 주도를 하고 있지만 외교부도 그 과정에 계속 참여를 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교도통신은 강 장관이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국제사회의 인권문제를 자리매김하도록 준비하고 있다고 밝힌 데 대해 일본 정부는 주한 일본대사관을 통해 우려를 전달했다고 전했다.

일본 정부는 1992년부터 유엔 인권위원회에서 위안부 문제에 관한 토의가 시작되자 이 문제는 유엔 창설전의 문제이며 유엔은 그러한 문제에 대해서 아무 권한도 없다고 주장하고 이후 유엔에서 나온 어떠한 조치에 대해서도 거부하는 자세로 일관하고 있다.

또한 지난 1995년 무라야마 도미이치 당시 일본 총리가 개인적으로 사죄와 반성의 뜻을 밝혔을 뿐 일본 정부는 공식적인 사죄를 하지 않았고 배상문제 역시 민간 차원의 ‘여성을 위한 아시아 평화 국민기금’으로 일부 피해자들에게 위로금을 지급한 뒤 “피해자들에게 배상했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을 뿐이다.

강경화 외교부 장관이 지난 1월 9일 오후 서울 종로구 외교부 브리핑룸에서 한일 위안부 합의 처리 방향 관련 발표를 하고 있다. 강 장관은 “일본 출연금 10억 엔, 우리정부 예산으로 충당하겠다”며 “위안부 합의 파기나 재협상 요구 없다. 위안부 피해자 명예존엄 회복 위해 모든 노력 다 할 것”이라 말했다. (사진출처_뉴시스)

일본의 진실한 반성과 화해만이 용서. 정부의 적극적인 노력 필요

아무 것도 모르고 일본군에게 끌려가 끔찍한 하루하루를 견뎌야 했던 소녀들의 모습을 담은 ‘귀향’, 피해 할머니들의 증언으로 위안부 문제를 다룬 ‘낮은 목소리3-숨결’, 2007년 미 연방하원에서 통과된 ‘위안부 결의안(HR 121)’을 앞두고 열린 청문회의 이용수 할머니가 증언에 나선 모습을 그린 ‘아이 캔 스피크’, 그리고 최근 허스토리까지.

위안부 문제는 그들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의 문제다. 여전히 위안부를 소재로 한 영화가 나오고, 매주 많은 사람들이 수요집회에 참여하는 것은 결코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는 얘기다. 정부가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

여러 영화에서도 보여줬지만 실제로 위안부 할머니들은 우리가 알고 있는 것보다 더 큰 아픔 속에서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다. 할머니들에게 당시의 고통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할머니들이 바라는 것은 한일협정 당시 일본정부가 인정하지 않았던 사죄와 전쟁 범죄에 대한 인정이다. 가해자는 반드시 처벌받는다는 사회 정의와 위안부 할머니들의 짓밟힌 명예를 되돌려 주는 것. 이것이 할머니들이 바라는 진정한 사과다.

이쯤에서 역사 반성에 적극적인 독일정부의 모습에 부러움이 쏠린다. 독일은 나치 패망 후 적극적인 반성과 배상에 나섰다. 60년 간 약 700억 유로(약 92조 6500억 원)을 이스라엘 정부와 개인에게 배상금으로 지급했다. 그리고 독일 지도자들은 사죄와 반성의 메시지를 끊임없이 보내고 있다. 일본정부 모습과는 참으로 대조된다.

1970년 12월 7일 폴란드 바르샤바를 방문한 당시 서독 빌리 브란트 총리가 2차 세계대전 유대인 희생자 위령탑에서 헌화하다 무릎을 꿇었다. 당시 이 모습을 보고 세상은 “무릎 꿇은 것은 총리 l한 사람이지만 일어선 것은 독일이었다”고 말했다.

지난 2015년 2차대전 종전 70년이 되는 해에 일본을 방문한 독일 메르켈 총리는 “한·중·일 화해의 출발점은 역사를 직시하는 것”이라며 “홀로코스트 같은 비참한 경험에도, 세계가 독일을 받아들인 것은 독일이 역사를 직시했기 때문”이라고 일본 역사 인식에 대해 비판했다.

지난 3월 1일 문재인 대통령은 제99주년 3.1절 기념사에서 “저는 일본이 고통을 가한 이웃나라들과 진정으로 화해하고 평화공존과 번영의 길을 함께 걸어가길 바란다. 저는 일본에게 특별한 대우를 요구하지 않는다. 그저 가장 가까운 이웃나라답게 진실한 반성과 화해를 위해서 함께 미래로 나아가길 바랄 뿐이다”고 말했다.

많은 위안부 할머니가 진정한 사과 한 번 받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다. 지난 4월 23일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최덕례 할머니가 9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면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는 현재 28명밖에 남지 않은 상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물질적 보상보다 정신적 보상을 진실 된 보상을 바라는 그들의 목소리는 그들이 살아있는 한, 또 이 문제가 세상에 드러난 이상 계속 울릴 것이다.

 

“끌려간 열네 살 적 해맑은 소녀 시절을 찾아 ‘다시 태어나서 여자로 살아보고 싶다’는 그 소원 이루시길 비오니, 눈물로, 촛불로 온몸으로 부른 정의와 평화 부디 꽃처럼 누리소서.”

-지난 3월 31일 90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 안점순 씨에 대한 추모 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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