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호! 통제라.
잠결에도 꿈결에도 안타깝도다.
덜렁거리며 이동하는 함거는 날 지옥으로 인도하니
그 날의 결단이 새삼 애달프다.
내 일본을 정벌하고 오늘을 맞이했다면 하늘을 우러러 부끄러움 없고
땅을 딛는 힘이 서럽지 않을 것을.
죄인(罪人)으로 끌려가는 처량한 몰골.
혼(魂)으로 남더라도 남해바다 수호하리다.

(이순신의 심중일기(心中日記) 1597년 정유년 3월 1일 신묘)

“그를 한 번 만나보고 싶구려.”

“기꺼이 그리 하도록 하겠습니다. 일본서 돌아오면 대감을 뵙도록 조치하지요.”

“나이가 어찌 된다고요?”

“둘째 아들 울과 동갑입니다. 스물 넷... 신미생(辛未生)입니다”

“앞으로 큰일을 해 낼 수 있는 동량(棟梁)이 장군의 휘하에는 즐비하니 참으로 감축(感祝)드리오.”

유성룡은 매우 유쾌하게 웃으며 술잔을 이순신에게 권했다. 그러고 보니 김충선을 얻게 된 것은 실로 행운이었다. 그는 둘째 울과의 친분으로 인해서 인사차 이순신의 전라좌수영을 방문 했었다. 당시는 전란의 첫 해인 임진 원년이었고 매일 전쟁 준비로 혼란스러웠다. 그때 김충선은 의병장 곽재우와 활동하면서 조총의 제조와 사격술 등을 의병에게 전파하고 있었다. 평소에 일본인에게는 적지 않은 경계심을 지니고 있었던 터라 마음을 열어 받아주지는 못했다.

그때 그가 말했다.

“장군의 군영을 보니 매우 안심이 됩니다. 장군의 조선 수군은 훈련과 방비가 철저하여 일본 수군을 압도할 것입니다.”

누구도 이순신에게 이런 말을 해 준 사람은 없었다. 김충선은 이어서 제안했다.

“일본의 조총을 조선식으로 개발하여 수군에게 보급하게 되면, 판옥선의 총통(銃筒)과 더불어 무적함대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김충선은 성의를 다하여 수군의 조총을 제조하고 사격술을 전수해 줬다. 이순신은 조선을 위하여 최선을 다하는 김충선에게 빠지지 않을 수 없었다.

“앞으로 넌 울과 함께 나의 아들이다!”

그리고 더 이상의 말은 필요 없었다. 이순신은 날이 갈수록 대단한 청년과 마주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가 지니고 있는 재능과 심지(心地)의 끝을 도무지 알아낼 수가 없었다. 이것은 김충선도 마찬가지였다. 이순신이란 조선 수군의 장수는 경외의 대상이었다. 그의 행동과 사색 하나하나는 구국을 위한 행위였다. 그들은 이제 서로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경지에 이르렀다.

“대감이 통제영을 그냥 지나치셨다면......”

이순신이 숨을 몰아쉬면서 말을 잇지 못했다. 아쉬움이 남아있기 때문인가. 유성룡의 눈빛이 머물렀다.

“조선의 운명이 달라질지도 모른다는 말을 하고 싶은 거요?”

“어찌 생각하십니까?”

“결과를 예측하기는 매우 어려우나 장군이 무사 하기는 어렵지 않겠소? 협상은 그 날로 깨질 터이고.”

“우린 명국과 일본의 강화협상은 절대 이뤄질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물론 어렵다는 건 인정하오. 하지만 단정 지을 수는 없소.”

“심유경이 실패하면 대감은 우리의 기습전을 용인해 주시는 겁니다!”

이순신이 한 발 물러서고 있었다. 상대는 서애 유성룡이었고 그는 오늘의 이순신을 존재하게 한 장본인 이었다. 명나라를 철석같이 믿고 의지하는 조선의 임금과 신하들도 큰 부담이었다. 유성룡이 옥으로 만든 술잔을 들어 올렸다.

“용인하지요. 장군의 전술에 동의하오.”

이들의 술잔이 가볍게 마주치며 명쾌한 비명을 질렀다. 역사가 비껴가는 소리였다.

 

김덕령은 그 소리에 아연한 표정을 지었다.

“김새는군. 서애 대감이 통제영을 방문하시는 바람에 그리 되었나?”

울은 한 겨울임에도 상체를 드러내고 창술을 연마 중이던 그의 단단한 복근을 장난스럽게 어루만졌다.

“우와, 죽이는군. 돌덩이야! 칼끝도 들어가지 못하겠어.”

“이보시게, 도검이 침범하지 못하면 무얼 하나? 일본 천황을 때려잡으러 호랑이굴에 진입하지 못한다면 다 소용 없네.”

김덕령은 장창을 병기고(兵器庫)에 던져 버리고는 연무장 뒤편의 우물가로 향했다. 매서운 한파로 주렁주렁 얼어붙은 우물 지붕 주변의 고드름을 울이 떼어냈다.

“이게 창끝같이 날카롭네.”

김덕령은 두레박으로 차가운 우물물을 끌어올려서 대야에 붓고 얼굴을 벅벅 씻어댔다. 사방으로 물이 튀고 희뿌연 김이 피어올랐다. 그 광경을 지켜보면서 울은 고드름으로 김덕령의 복근을 콕콕 찔러댔다. 김덕령은 여전히 씨근거리고 있었다.

“서애대감이 발목을 잡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어.”

“아버님도 매우 안타까워 하셨지만 우리 너무 애석해 하지는 말지. 그냥 연기되었을 뿐이니까.”

김덕령은 울의 손에서 고드름을 뺏어서 그대로 집어 던졌다. 쌩 하는

파공성과 더불어 그 고드름이 오 척 거리의 단풍나무에 명중되었다.

“아...앗?”

울은 자신도 모르게 놀라운 비명을 토했다. 고드름이 나뭇가지에 꽂혀버린 것이다. 놀라운 일이었다. 얼음이 부서지지 않고 끝이 나무를 파고들어 박혀버렸다니.

“일본 천황의 목을 꿰뚫어 버려야 했거늘!”

김덕령의 기예를 목격한 울은 믿어지지가 않았다.

“과연 김덕령이군. 이런 무술을 지니고 있으니 익호장군(翼虎將軍)이라 부를만하지.”

선조의 둘째아들 광해군(光海君)으로부터 군기와 장군의 칭호를 받은 김덕령은 홍의장군 곽재우와 더불어 조선의 의병대장으로 신망을 한 몸에 받고 있었다.

“기회란 놈은 그리 쉽게 찾아오지 않는 법일세.”

김덕령은 탄식하듯 중얼거렸다. 아쉬움이 컸다. 사야가 김충선의 제안과 통제사 이순신의 결단은 실로 충격적인 일이었다. 조선과 명나라, 일본의 정국을 완전히 뒤집어 버리는 사건이 될 수도 있었다.

“곽장군님에게도 통보 하였는가?”

“형님이 가셨네.”

“왜구의 땅에 붉은 옷깃을 휘날리며 누비는 그 어르신의 모습을 기대하였거늘 정녕 실망이 크군.”

“얼마 남지 않았어. 명나라 사신 심유경은 협상을 실패할게 뻔해.”

단언하는 울을 보면서 김덕령은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건 모르는 소리일세. 설혹 실패한다 하여도 우리에게 이런 절호의 호기가 오겠는가? 또 다시 육지와 해상에는 왜적들이 미친놈 발광하듯 지랄을 떨지 않겠나? 이런 조선의 바다와 육지를 넘겨주고 어찌 일본 본토의 기습을 감행할 수 있는가?”

울도 장난스런 표정을 거두고 진지한 눈빛을 건네며 부친 이순신의 견해를 차분히 풀어낸다.

“강화협상이 결단 나게 되면 일본은 조선 침공을 다시 전개 하겠지. 하지만 이번에는 우리가 선공을 가하게 될 터이니 적들은 매우 혼란에 빠질 것이 분명해. 지금 일본으로 잠입한 충선이 귀환하게 되면 이 부분을 집중적으로 감시하여 시기를 정할 것이니 형(兄)은 정예 병력을 훈련시키면서 마음을 여유롭게 가져 달라는 것이 아버님의 부탁이야.”

김덕령이 미처 대답을 하기도 전에 시선을 빼앗길 수밖에 없는 상황이 벌어졌다. 저만치서 단아한 차림의 처녀가 가뿐한 걸음걸이로 다가오고 있었다. 예지(睿智)였다. 울은 그녀를 두 번째 만나보는 것으로 김덕령의 정혼녀(定婚女)다.

“이런 낭패가......”

김덕령은 서둘러 의복을 찾아서 허둥지둥 걸쳤다. 그런 친구를 슬쩍 몸으로 가려주면서 울이 나선다.

“이야, 오늘은 행운이 따르는 날인 모양이외다. 예지아씨를 이런 곳에서 뵙게 될 줄은 정말 몰랐습니다.”

울이 반가운 인사를 건네자 예지도 미소로 답했다.

“두 분이 함께 계셨군요. 어서 오시어요.”

“연무장까지 어인 일이요?”

김덕령은 옷매무새를 가다듬으며 예지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손에 들고 있던 작은 보따리를 슬쩍 내밀었다.

“저기... 도련님이 무예에 열중 하시어 땀으로 늘 내의가 적셔지는지라 옷을 좀 지어왔습니다.”

그 보따리를 김덕령을 대신하여 울이 성큼 받았다.

“이렇게 감사할 때가 어디 있소. 소제 역시 무술 훈련만 임하게 되면 땀이 비 오듯이 쏟아져서 내의를 흠뻑 적시고 만답니다.”

“그러시군요. 죄송하옵니다만 이건 우리 익호장군님의 체형에 맞추신 거라서......”

예지는 빙긋 웃으면서 그 옷 보따리를 다시 낚아채 갔다. 울의 손이 재차 빠르게 움직였다.

“체형이 다르다하나 소제는 형의 옷을 입을 수 있습니다. 그러니......”

하지만 예지의 손에 다시 들어간 보따리를 움켜잡는 게 쉽지 않았다. 그녀는 울의 움직임을 간파하며 재빨리 이리저리 옷 보따리를 빼돌렸다. 양반집 규수라고 볼 수 없는 신속한 동작이었다.

“예지아씨가 날 희롱 하려는 겁니까?”

울은 더욱 민첩하게 몸을 날렸으나 예지는 그 보다 한 수 위였다.

“감히 울 도령을 어찌 희롱할 수 있겠습니까? 소녀는 단지 보따리의 주인을 찾을 따름입니다.”

그녀는 나비처럼 울의 주변을 훨훨 날아 다녔다. 울은 동접(冬蝶)을 채집하기 위해 헛손질을 하며 따라 다니는 어린아이 같았다. 역부족이었다. ‘이건 말도 안 되는 일이야 ?’ 라고 울은 놀라움을 금치 못하고 있었다. 비록 무과(武科)를 통해 실력을 입증 받지는 않았으나 울의 무술은 예사롭지 않은 수준이었다. 그가 병과에 응시하지 않은 이유는 기실 부친 이순신장군이 통제사의 요직에 머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울은 장형 회와 더불어 무관을 꿈꾸며 다년간 무술을 수련했었다. 이런 울을 상대로 추호의 동요도 보이지 않고 요리조리 움직이는 현란한 발걸음은 실로 충격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였다. 울의 눈동자와 입이 점차 크게 확대되었다. 호흡이 가빠지고 놀람이 갈수록 커졌다. ‘내가 꿈을 꾸고 있는 건 아니겠지!’ 울은 믿을 수 없는 현실에 당혹감과 더불어 크게 수치심마저 들었다. 1595년 을미년 12월의 어느 날 일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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