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헌 윤봉길, “너희는 조국의 투사가 되어라”

(시사매거진248호=오경근 칼럼니스트) 작지만 나름 단단하고 우람한 코끼리 형상으로 인해, 백제시대 ‘상왕산(象王山)’이라 불리던 충남 예산의 ‘가야산(伽倻山)’은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후 국가의 중대한 제사(중사)를 지내기 위해 산 아래 ‘가야사’란 사찰을 세운 뒤 가야산으로 불리게 되었다. 특히 이곳은 ‘왕재(王才)가 태어날 곳’이라는 풍수지리설을 타고, 조선 후기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아버지인 남연군 이구가 묻힌 곳으로 유명하다. 그런 그곳에 1932년 중국 상하이 홍커우 공원에서 일본의 수뇌부에 폭탄을 투척한 독립운동가 윤봉길 의사가 태어나 역사적·지역적 의의를 더한다. 비록 몰락한 가문의 한미한 양반가 자재로 태어났으나, 어릴 때부터 한시에 능했던 윤봉길 의사는 시문집을 출간하며 ‘매헌’이란 호를 얻는다. 더불어 문사철(文史哲)에 뛰어난 그는 애국적 행보를 이어가며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하여금 중국 국민당 장제스의 지원을 받아 항일운동을 이어갈 수 있는 포문을 열어 준다.

대왕 코끼리 형상의 가야산과 왕재의 출생설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과 서산시 운산면, 해미면에 걸쳐 있는 가야산 (伽倻山)은 비록 그 규모는 작지만 주변에 많은 문화유적을 간직한 명산으로 오래 전부터 이름을 떨치고 있다. 간혹 경상남도 합천군에 있는 가야산과 전라남도 광양시에 있는 가야산 그리고 전라남도 나주시에 위치한 가야산 등과 혼동을 일으키는 수가 있지만, 이곳만의 특징은 역시 백제 시대 마애석불의 최고봉인 서산마애삼존불상이 자리하고 있다는 것이다.

본래 ‘가야’라는 명칭은 ‘절가(伽)’자와 ‘땅이름야(倻)’자를 합해 ‘붓다가 깨달음을 이룬 붓다가야(buddhagayā)의 서북쪽에 인접한 산’을 기리기 위해 차용된 것으로 본다. 신라시대 원효가 당나라에 유학을 가던 길에 한밤중 갈증을 느껴 해골에 담긴 물을 마시고 깨달음을 얻어 일심과 화쟁 사상을 중심으로 대중화에 힘쓴 불교는 신라를 넘어 백제에서 가장 이상적인 작품으로 승화되었다. 이어 종교적 이상향에 다다르고자 하는 서민적 열망에 따라 전국 각지의 크고 작은 산에 사찰이 세워지고 부처가 머무는 곳, 서방정토를 의미하는 ‘가야’라는 명칭이 따라붙게 된다.

그로 인해 이곳 충청남도 예산군에 위치한 가야산에도 678m 가야봉을 중심으로 605m의 원효봉, 653m의 석문봉, 593m의 옥양봉 등의 이름이 명명되고, 백제시대 마애석불의 최고 걸작인 국보 제84호 서산 마애삼존불상을 비롯한 보원사지, 개심사, 일락사 등이 세워지게 된다. 이외에 국보 1점, 보물 6점, 기타 문화재 4점 등을 비롯한 문화재가 내포 문화권의 핵심지역임을 입증한다.

또한 능선 아래에서 바라보는 조망 역시 매우 뛰어나 서쪽으로는 서산과 태안 그리고 천수만과 서해를 조망케 한다. 그리고 내륙 쪽으로는 예당평야가 넓게 펼쳐져 있어 시원하게 탁 트인 운치를 내보인다. 특히 이 곳에는 가야산과 서원산 473m 사이에 위치한 덕산면 상가리에 조선후기 왕도를 장악한 흥선대원군의 아버지 이구 ‘남연군의 묘(충청남도기념 물 제80호)’가 위치해 ‘2대에 걸쳐 왕이 나온다’는 풍수지리설을 뒷받침 하고 있다.

가야산자락 원효봉 아래에는 오늘날 ‘대한민국’의 여명을 열었던 독립운동가 매헌 윤봉길 의사가 태어난 생가가 위치해 있다. 그는 19세 때부터 식민지 현실의 빈곤과 궁핍, 무지의 소치를 깨닫고 농민운동에 앞장섰으며 25세의 나이로 조국을 위해 장렬히 산화되어 갔다.  

윤봉길 의사의 고향인 충남 예산군 덕산면 시량리에 있는 충의문에는 그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공동묘지 팻말에서 국민적 무지의 소치 깨닫다 

1908년 6월,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 시량리 도중도에서 태어난 윤봉길(尹奉吉) 의사는 몰락한 양반가의 자제다. 아버지 윤황과 어머니 김원상의 5남2녀 중 장남인 그는 본명이 우의이고, 별명이 ‘봉길(奉吉)’이다. 후에 아호를 매헌으로 쓴다.  

6세 때부터 큰아버지 윤경에게 천자문을 배웠고, 11세 되던 해인 1918년 덕산공립보통학교에 입학했다. 이어 다음 해인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나자 민족정신의 영향을 받아 일제 식민지 교육을 거부하고 자퇴한다. 그의 동생인 윤성의와 함께 최병대 선생에게 한학을 수학했고, 1921년부터 매곡 성주록 선생이 운영하던 <오치서숙>에서 사서삼경 등을 공부했다. 특히 그는 뛰어난 시재를 보여 시문집을 쓰기도 했다. 이때 ‘매헌’이란 아호를 얻게 된다.

그리고 15세 때인 1922년에는 배용순과 결혼한다. 4년 후 19세 되던 1926년에는 서숙생활을 마친 뒤 독학으로 국사와 신학문을 공부하고, 친구들과 교우하는 등 현실적인 문제를 직시하며 산 체험을 넓히는 등 농촌개혁에 눈을 뜬다. 그러던 어느 날, <오치서숙> 맞은편에 있던 공동묘지에서 글을 모르는 한 청년이 묘지 팻말을 한 아름 뽑아들고 와서 윤봉길 의사에게 “글을 아느냐”고 묻는다. 자기 아버지의 묘비를 찾아달라는 간청을 들으며 탄식 하게 된다. 이 청년은 자기 아버지의 묘비는 물론이고 인근 묘비까지 아무런 표시를 남기지 않고 모조리 뽑아 온 것이다. 이로 인해 나머지 묘비의 위치와 주인마저 알 수 없게 된 상황을 접하며 윤 의사는 무지의 소치를 깨닫게 된다. 이러한 경험을 바탕으로 윤봉길 의사는 문맹퇴치를 위해 농민운동을 추진하게 된다. 국민적 무지가 곧 조국을 일본에 강탈당하는 원인이 되었다는 지론이다. 

윤봉길 의사의 기념관은 충의문 인근에 마련되었다.

사랑방 야학 & 장부출가 생불환 

1926년 <오치서숙> 동학들과 농촌계몽의 첫 시도로 문맹퇴치운동을 생각하고, 사랑방에 야학을 개설한다. 농민계몽을 위해 <농민독본>이란 교재를 집필하여 야학회를 조직하고, 학교에 다니지 못하는 농촌의 불우한 청소년들을 모아 직접 가르쳤다. 그리고 농촌의 발전을 위해 부흥원이란 단체를 설립하여(1929) 부흥운동을 본격적으로 추진한다.

그 해 2월 18일 부흥원 주관으로 학예회를 열고, 촌극인 ‘토끼와 여우’를 공연하였다. 당시 농촌에서 문화 활동이 그리 많지 않던 때라 공연은 매우 큰 방향을 불러일으켰다. 이것이 원인이 되어 ‘요주의 인물’로 일본 경찰의 주목을 받게 된다. 그러나 이후에도 농촌활동을 계속 펼쳐나갔고, ‘월진회’라는 농민단체를 만들어 회장에 추대되는 등 적극적인 농촌 자활운동을 이어 나간다. 또한 건강한 신체 위에 농촌의 발전과 민족 독립정신이 길러질 수 있다 는 신념으로 ‘수암체육회’를 조직하여 농민들의 건강증진활동을 이끌어 나간다.

그런 그가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칠 각오로 집을 떠난다. 그동안 월진회 동료들이 마련해준 여비 50원을 품에 안고, ‘장부출가 생불환(대장부가 집을 떠나 뜻을 이루기 전에는 살아서 돌아오지 않는다)’라는 글을 남긴다. 이 정보를 입수한 일본 경찰이 추적하여 평안도 선천에서 체포돼 45일간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만주로 망명한 그는 대한독립군 김태식, 한일진 등을 만나 함께 독립운동을 결의하게 된다. 아울러 만주 동포를 위해 농무회를 조직하고 계몽강연을 펼치기도 했다.

윤봉길 의사는 그 짧은 생애에도 많은 명언을 남겼다. 그의 명언을 기리기 위해 기념관 옆에 어록탑이 세워졌다.

홍커우 공원의 수류탄 투척, ‘너희는 조선의 투사가 되라’ 

윤봉길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가야 성공적인 독립운동을 추진할 수 있을 것으로 판단하고 상하이를 향해 떠난다. 혼자 랴오둥 반도의 남단에 있는 다롄을 거쳐 산동반도에 있는 칭다오로 향한다. 그리고 그곳에서 세탁소의 직원으로 일을 하며 모은 돈으로 독립운동을 지원한다.

1931년 5월 임시정부가 있는 상하이에 도착한 그는 프랑스 조계(프 랑스가 조차한 지역)에 있는 안공근의 집에 머물게 된다. 그는 자립 경제생활을 위해 박진이 운영하던 말총모자공장에서 일하며 외국어 공부를 시작한다. 이어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 지도자인 김구 선생을 찾아가 뜻을 전하고 조국의 독립을 위해 몸과 마음을 바칠 것을 다짐한다. 이듬해인 1932년, 일본군은 시라카와 대장의 지휘하에 자작극 ‘일본 승려 살해사건’을 이유로 상하이사변을 일으켜 승리로 이끈다. 이어 히로히토 일왕의 생일기념식인 천장절에 승리를 자축하는 행사를 거행한 다는 계획을 세운다. 윤봉길 의사는 이 기회를 통해 거사를 결심한다. 그리고 1932년 4월 26일, 한인애국단에 입단하여 김구를 비롯해 이동녕, 이시영, 조소앙 등 지도자들과 협의를 통해 작전을 세운다.

먼저 그는 야채상으로 가장하여 기념식에 대한 정보를 입수하고, 폭탄 제조 전문가인 김홍일의 도움을 받아 수류탄을 제조한다. 1932년 4월29일, 저격용 물통 모양의 폭탄 1개와 자결용 도시락 모양의 폭탄 1개를 감추고 행사장에 입장한 그는 자축하는 열기가 한창일 때 단상을 향해 수류탄을 던진다. 이 폭발로 일본군 시라카와 대장과 거류민 단장 가와바다가 즉사하고, 제3함대 사령관 노무라 중장과 제9사 단장 우에다 중장, 주중공사 시케미쓰, 상하이 총영사 무라이 등이 중상을 입는다. 윤봉길 의사는 현장에서 체포되었고 곧 일본 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선 고받았다. 그는 같은 해 11월18일, 일본으로 이송돼 오사카 육군위수 형무소에 수감되었다. 그리고 그해 12월19일 총살형을 받고 25세의 젊은 나이에 순국한다. 이 사건은 중국을 비롯한 세계열강에 알려졌고, 중국 국민당 지도자 장제스는 “중국 100만 대군도 하지 못한 일을 조선의 한 청년이 해냈다”고 극찬하였다.

이후 독립을 맞이한 대한민국에서는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그는 거사에 앞두고 어린 아들에게 유언을 남겼다. “너희도 만일 피가 있고 뼈가 있다면 반드시 조선을 위해 용감한 투사가 되어라. 태극의 깃발을 높이 드날리고, 나의 빈 무덤 앞에 찾아와 한 잔의 술을 부어 놓아라. 그리고 너희들은 아비 없음을 슬퍼하지 마라. 사랑하는 어머니가 있으니… 동서양 역사상 보건데 동양으로 문학자 맹자가 있고, 서양으로 불란서 혁명가 나폴레옹이 있고, 미국에 발명가 에디슨이 있다. 바라건대 너희 어머니는 그의 어머니가 되고, 너희들은 그 사람이 되어라.”

예산군 덕산면 시량리에 있는 저한당은 윤봉길 의사가 중국으로 망명하기 전까지 살았던 곳이다.
저작권자 © 시사매거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