헝가리의 역사 & 관광명소

(시사매거진 256호=서원진 기자) 수교 30주년을 맞이한 한국 헝가리와의 관계는 조선시대부터 이어온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다. 하지만 지구 반대편에 위치한 유럽의 작은 나라이기에 독자들에겐 생소하기만 하다. 본지는 수교 30주년을 기념하여 동양적 향수를 간직한 유럽 속에 작은 아시아, 헝가리의 각 분야를 망라하고 현지 부다페스트 시민이 추천한 관광명소 5선을 정리하여 <기획특집 시리즈>로 소개한다. - 편집자주 -

건국 초기
헝가리 민족은 우랄 산맥 동쪽에서 거주하던 유목민족으로, 어족은 우랄 어족의 한 지류인 핀-우그르 어족에 속하지만 그들의 정신적이고 물질적인 문화는 대부분 아시아와 동유럽의 광활한 평원에서 살았던 터키 유목 민족과 유사하다.
헝가리 민족으로 구성된 부족은 890년대에 카르파티아 분지에 침입해 그 지역을 차지하고 슬라브족과 불가리아-터키 민족을 통치했다. 10세기에 이르러 헝가리 민족의 경제적·사회적 환경은 유목 농경에서 정착 농경으로 급격하게 변화했다. 
초대 국왕인 이슈트반 1세(István I, 재위 1000~1038년)는 완전히 다른 문화와 종교를 가지고 있었던 헝가리를 주변국과 동화시키고자 기독교를 수용하였고, 이교도의 침입을 막아내는 서유럽의 방파제 역할을 수행하게 되었다.

오스만 제국의 침략과 헝가리의 분단
마챠시 1세(Mátyás I, 재위 1458~1490년)의 통치 하에 안정된 발전을 지속하고 있었던 중세 헝가리는 그의 사망 이후 귀족과 성직자들의 전횡이 심해지면서 경제·사회적 불안이 가속화되었다. 생존의 위협을 느낀 농민들의 반란이 일어나는 등 내부적 갈등이 심해지는 동시에 국경 동쪽으로부터 강성한 오스만 제국의 침략이 시작되었다.
1526년 벌어진 모하치(Mohács) 전투에서 패배한 헝가리는 수도 부더(Buda)를 포함한 헝가리 중부 주요 영토를 오스만 제국에게 할양하였고, 서부 영토의 일부분은 합스부르크 왕가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이후 헝가리는 약 150년간 합스부르크 왕가가 직접 통치하는 도나우(Donau) 강 서쪽의 로열 헝가리(합스부르크 헝가리)와 오스만 왕가가 직접 통치하는 부더를 포함한 구 헝가리 왕국의 중앙부인 오스만 헝가리, 오스만 아래서 큰 자치를 누리는 트란실바니아를 통치한 터키 보호령의 헝가리 왕국으로 3분 되었다.

이슈트반 1세(970/975~1038년, 재위 머저로 대공 997~1000년, 헝가리 국왕 1000~1038년)가 1000년에 국왕의 칭호와 함께 교황 실 베스테르 2세(946~1003년, 재위 999~1003년)로 부터 즉위식 때 받았다는 전설이 있는 왕관이다. 이슈트반 1세의 왕관은 왕의 권위를 상징함과 동시에 민족주권의 상징물로 여겨져 왔다. 현재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 왕관 중 하나로 실물은 헝가리 국회의사당에 보관되어 있다.

합스부르크 왕가 시기의 통일과 지배
오스만 제국의 힘이 약해지자 합스부르크 왕가는 헝가리 내의 지지세력과 연합하여 1686년 마침내 수도 부더를 탈환했다. 
그리고 1699년 카를로비츠(Karlowitz) 조약을 체결하여 헝가리 왕국의 왕위를 합스부르크 왕가에서 계승하도록 하고 헝가리의 귀족 계층은 지방 각 주의 자치권만을 갖기로 하여 헝가리는 통일과 함께 합스부르크 왕조의 통치 하에 놓이게 되었다.
합스부르크 왕조의 지배에 저항하여 1703년 라코치 페렌츠 2세(Rákóczi Ferenc Ⅱ, 1676~1735년)가 대대적인 독립 전쟁을 일으켰으나 실패로 끝났으며, 18세기부터는 비교적 안정적인 통치가 이루어졌다. 합스부르크 왕조의 가장 명민한 통치자였던 마리아 테레지아 여왕(Maria Theresia, 재위 1740~1780년)의 통치 시기에는 헝가리의 귀족들이 그녀에게 ‘몸과 마음을 다 바칠 것’이라는 충성 맹세를 하는 등 합스부르크 왕조에 우호적인 성향을 띠게 되었다.
150여 년간 오스만 제국의 영향 하에 있었던 헝가리는 이 시기에 이르러 비로소 다시 유럽의 문화와 역사 속으로 편입되어 발전할 수 있었다. 
비록 독자적인 왕조를 이루지는 못했으나 합스부르크 왕조의 지배에 반기를 들거나 혹은 수용하는 과정에서 오히려 민족의 언어와 문화에 대한 중요성을 깨닫고 발전시켰으며, 서유럽의 발전된 문화를 동시에 수용하면서 헝가리의 문화는 새 전기를 맞이할 수 있었다. 
또한 사회가 안정되면서 인구가 늘고, 생산력이 증가하였으며 1796년 발발한 나폴레옹 전쟁에 물자를 공급하면서 경제적으로도 크게 성장하였다.
이렇게 발전하는 헝가리를 견제하고자 합스부르크 왕조에서는 다양한 차별 정책을 시행하였고, 이에 반발하여 헝가리에서는 세체니 이슈트반(Széchenyi István, 1791~1860년), 코슈트 러요시(Kossuth Lajos, 1802-1894년) 등 유명한 개혁가와 혁명가가 등장하여 합스부르크와 보수 헝가리 왕국에 대해 비판의 목소리를 높여갔다. 
그리고 1848년에는 헝가리의 위대한 민족 시인 페퇴피 샨도르(Petófi Sándor, 1823~1849년)를 중심으로 하여 헝가리 독립 혁명이 일어났고, 이 혁명이 실패한 이후에도 헝가리의 자주독립을 주장하는 목소리는 끊이지 않았다.
이미 예전의 군사력과 경제력을 잃은 합스부르크 왕조는 결국 1867년 정치·외교·군사 등 모든 면에서 헝가리를 동등한 동반자로서 인정하는 '대타협(Ausgleich)'을 선언하여 헝가리와의 평화를 유지하고자 하였다. 
이 대타협의 결과로 오스트리아-헝가리 이중제국이 건설되었고, 제1차 세계대전이 종식되는 1918년까지 지속되었다. 이 기간 동안 형가리는 정치·경제·문화·예술 등 모든 면에서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었으며, 형가리 민족에 대한 자부심 또한 높아졌다. 오랜 기간 동안 형가리의 왕도였던 부더 지역과 경제적 중심지였던 페슈트를 잇는 다리가 건설되면서 두 지역이 통합되어 ‘부다페스트’라는 형가리의 수도가 탄생한 것도 이 시기였으며, 영국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로 지하철이 건설되는 등 기술적인 발전도 급속도로 진행되었다. 

페르디난트 5세의 대관식 연회-왕족, 외교관을 비롯하여 각 영지의 귀족들이 모두 참여했는데 엄격한 위계질서에 따라 앉게 되고 의전에 따라 접대 순거가 정해졌다.

헝가리 공화국
제1차 대전이 진행 중이던 1918년, 미국의 월슨 대통령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내 제 민족의 민족 자결권과 독립을 보장하겠다는 내용을 포함한 14개조 원칙을 발표하였다. 
전쟁이 동맹국의 승리로 마무리 될 즈음에 헝가리 국민 의회가 결성되었고, 카로이 미하이를 수상으로 선출하였다. 이는 1848년 이후 처음으로 수립된 자주적 헝가리 정부였고, 11월 16일에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막을 내리고, 헝가리 공화국을 선포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1914~1918년) 당시 동맹국에 가담해 패전국이 된 헝가리는 1920년 트리아농(Trianon) 조약을 맺으며 국토의 70%를 잃는 충격을 겪어야 했다. 
이후 제2차 세계대전(1939~1945년)에서도 패전국이 되면서 공산화 되었다. 
1956년에는 스탈린 독재에 저항하는 민중운동으로 많은 시민들을 잃기도 하였으나 1988년 대립 세력 사이의 타협을 통해 평화적으로 민주화되었고, 1989년 공산권 국가로는 최초로 대한민국과 수교하였다.

헝가리의 헤렌드는 우아함과 격조, 단아한 아름다움이 절정의 수준에 올라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헤렌드는 도자기 브랜드 이름이기도 하지만 도시 이름이기도 하다.

헝가리, 부다페스트 시민이 추천한 관광명소 5선

헤렌드 Herend
세계적으로 유명한 도자기 브랜드 헤렌드가 탄생한 마을. 영국 왕실과 합스부르크 황실로부터도 인정받은 헤렌드의 역사는 1826년에 시작되었고, 이후 수제 자기를 고집하며 제작되어 왔다. 250개의 장미가 그려진 과일 바구니, 투각법과 망세공법으로 꽃과 새를 그려 넣은 디너 세트, 닭 모양의 인형 등 8000점 이상의 작품들이 헤렌드 도자기 미술관에 전시되어 있다. 공장 부속의 헤렌드 미니공방을 견학하며, 레스토랑과 카페도 즐길 수 있다. 

위치 : 헝가리 북서쪽, 부다페스트에서 130km, 차로 1시간 반
헤렌드 도자기 미술관 관람정보 : 영어 가이드 투어 가능, 입장료 유로, 도자기 만들기 체험 가능, 하계 09:30 - 18:00 (매일)

세계 4대 도자기 브랜드를 꼽을 때 일반적으로 독일의 마이슨, 덴마크의 로얄 코펜하겐, 영국의 웨지우드, 그리고 헝가리의 ‘헤렌드’가 포함된다. 헤렌드는 도자기 브랜드 이름이기도 하지만 도시 이름이기도 하다.
1826년 빈체 슈틴글(Vince Stingl)은 헤렌드에 도자기 제조공장과 법랑 제작연구소를 세운다. 하지만 사업 시작 10년 만에 파산하고 그의 채권자인 모르 피셔(Mór Fischer)가 1839년 공장을 인수하여 동업하다 이듬해인 1840년 독자적 체계를 확립한다. 
1842년 헝가리 최초의 공예 전시회에 작품을 출품하여 황실이 인정하는 공장의 영예를 안아 합스부르크 귀족들의 주목을 받기 시작한다. 
1851년 런던 만국박람회에 출품한 나비와 꽃무늬의 중국풍 테이블 웨어는 그랑프리를 수상하며 영국 빅토리아 여왕의 주문을 받아 영국 왕실 식탁에 오르게 된다. 이후 ‘퀸 빅토리아’로 불리며 헤렌드 최고의 클래식이 됐고, 1865년 프란츠 요셉 1세가 그의 자기 예술을 칭송하는 의미에서 귀족 자격을 부여하였고, 1872년부터 왕실 조달업자로 비엔나 양식과 자기 모양을 사용하도록 자격을 부여 받았다.
1874년 공장경영권을 그의 아들들에게 물려주었으나, 예술적인 측면이 감소하면서 생산수준이 급격히 하락하였다. 그러다, 모르 피셔의 손자인 예노 파르카슈하지(Jeno Farkasházy)가 물려받으면서 다시금 번영하였다. 1948년 공장은 국유화되었다가, 1993년 공산주의 몰락으로 사유화되었다. 주요 시장은 미국, 일본, 이탈리아와 러시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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