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생과 교수들이 하고 싶은 연구를 마음껏 할 수 있는 자유로운 학풍

교토대학 캠퍼스는 대도시이면서도 자연환경을 갖춘 도시의 풍경들을 그대로 담고 있다. 시간을 갖고 연구에 집중할 수 있는 교토대학만의 학풍이 만들어진 이유이다.(사진_교토대 의학 연구과 이수지)

 

[시사매거진 259호=이회두 기획편집국장] 교토대는 15개 대학원과 10개 학부, 13개 부설연구소, 박물관, 방사성연구소 등 17개의 교육시설과 세계적인 수준의 연구시설을 두루 갖추고 있다. 재학생은 학부와 대학원을 합쳐 2만여 명. 1949년 일본 최초로 노벨상(물리학)을 받은 유카와 히데키 박사를 시작으로 2018년 생리의학상 수상자 혼조 다스쿠 교수까지 7명(외국 국적자, 교토대 교수 포함 시 10명)의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했다. 수학 분야 노벨상으로 불리는 ‘필즈’상 수상자도 2명이나 나왔다.

도쿄대학이 주로 관료 양성 중점 대학이라면 교토대학은 학자를 양성하는 대학원 중심 대학이라는 게 일반적인 평가다. 예를 들어 도쿄대학은 무엇보다 국가경영에 필요한 ‘국가유용(有用)의 인재’를 육성하는 것이 최대 목적이라서 도쿄대학 출신자 중에는 관료나 관료 경험을 토대로 한 정치가가 많고 그들을 단속할 수 있는 위치에 있는 검찰에는 교토대학 출신이 많다. 

우리나라는 대학교의 역사가 길지 않아서인지 권위에 대한 충성도가 높은 것인지 몰라도 대학의 이름값에 따라 학과의 순위까지 정해지는 황당한 편중현상이 대부분이지만, 일본은 전공에 따라 이름 있는 대학들이 다르다. 

물론 그 중에서 일본제국 7대학이라는 명칭의 대학 교토대학(京都大学), 큐슈대학(九州大学), 홋카이도대학(北海道大学), 도호쿠대학(道北大学), 도쿄대학(東京大学), 나고야대학(名古屋大学), 오사카대학(大阪大学)들이 주를 이루기는 한다. 

교토대학은 물리학/화학 등의 기초과학 관련 일본 제 1대학으로 15개 대학원과 10개 학부, 13개 부설연구소, 박물관, 방사성연구소 등 17개의 교육시설과 세계적인 수준의 연구시설을 두루 갖추고 있다. 

재학생은 학부와 대학원을 합쳐 2만여 명이며 외국인에게 매우 개방적이다. 외국인 학생만도 2000여 명인데 몇 해 전까지도 일본 내 국립대학들은 조총련계 민족학교나 중국계 화교학교 졸업생에게 수험 자격을 주지 않는 차별을 두어왔다.

하지만 교토대학은 학문에 차별이 있을 수 없다는 교수들의 항의를 받아들여 국립대학으로서는 처음으로 민족학교 졸업생들에게 수험 자격을 부여했다. 학문 연구에서만은 정치·사회적 차이를 뛰어넘어 자유로움을 맘껏 느낄 수 있다는 것이다. 

열림과 자율을 추구하는 교토대학의 저력은 1949년 일본 최초로 노벨상(물리학)을 받은 유카와 히데키 박사를 시작으로 2018년 생리의학상 수상자 혼조 다스쿠 교수까지 7명(외국 국적자, 교토대 교수 포함 시 10명)의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했다. 수학 분야 노벨상으로 불리는 ‘필즈상’ 수상자도 2명이나 배출했다.

교토대학은 물리학/화학 등의 기초과학 관련 일본 제 1대학으로 15개 대학원과 10개 학부, 13개 부설연구소, 박물관, 방사성연구소 등 17개의 교육시설과 세계적인 수준의 연구시설을 두루 갖추고 있다. (사진_교토대 의학 연구과 이수지)

 

한국인 노벨상 후보자가 공부한 곳, 교토대학교
한국인 과학자로 노벨상 수상 가능성이 있었던 인물이 두 명인 이승기 박사(1905~1996)와 이태규 박사(1902~1992)도 모두 교토대학 출신의 과학자다.
1939년 교토대학 화학과의 사쿠라다 이치로(櫻田一郞) 교수와 공동으로 나일론에 이어서 세계 두 번째 화학섬유인 비날론(VINYLON)을 발명했다. 석유가 원료인 나일론과 달리 석탄을 주재료로 삼은 합성섬유다. 이 성과를 인정받아 교토대학 교수로 임용됐다.

이승기 박사는 광복 후 서울대 초대 공학부장이 되었지만, 극심한 사상 논쟁의 갈등 속에 한국전쟁 즈음 북쪽으로 건너가 북한에서 영변 원자력연구소의 초대소장이 되어 1996년 사망 때까지 핵개발을 주도했고 많은 핵 과학자를 길러냈다. 

북한이 보유했다는 내폭형 플루토늄 핵무기 개발에는 이 박사의 공헌이 지대했다는 것은 확인된 사실이다. 노벨 화학상의 유력한 후보였지만 당시의 복잡한 국제정세 속에서 수상의 기회를 갖지 못한 것이라는 평가가 있는 이 박사는 사회주의권의 노벨상이라 불린 레닌상을 수상했다.

양자화학을 전공하고 노벨 화학상 후보에 정식으로 이름을 올린 적이 있는 이태규 박사는 1920년대에 교토대학에서 유학하고, 1931년 한국인으로서 처음으로 일본에서 박사(이학박사)가 되었다. 

1938년 경성방직 사장 김연수(金年洙)와 일본 금강제약 사장 전용순(全用淳) 등의 후원을 받아 미국 프린스턴대학에 유학한 후 1943년 교토대학 교수가 되었는데 그는 일본에서 제1호 한국인 교수였다.

광복 직후인 1945년 11월 25일 이태규 박사는 교토대학의 정교수 자리를 버리고 귀국하여 경성대학(구 경성제국대학)의 화학과 정교수이자 이공학부장, 그리고 서울대학교 출범 후에는 초대 문리과대학장으로서 과학재건을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서울대학교 국대안 파동’ 등 정치적 갈등에 쫓겨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 유타대학의 화학과 교수가 되었다.

한국과학문명학연구소의 소개에 의하면 이태규 박사는 유타대학 대학원장이 된 동료 아이링교수와 함께 연구한 양자(이론물리)에 관한 ‘Lee―Eyring 이론’으로 이론과학 분야에서 한국인의 이름이 들어간 최초의 공식을 발표한 국제파 학자였다고 한다. 

이 박사가 유타대학에 재직하는 동안 우수한 한국인 유학생들이 그의 문하에서 지도를 받고 다음 세대 한국 과학계의 중핵을 형성했는데 양강, 한상준, 장세헌, 김각중, 전무식, 백운기 등이 유타대학에서 이태규에게 사사하고 한국 화학계의 지도적 위치에 올랐으며, 물리학에서도 권숙일, 이용태 등이 유타대학에서 공부하며 이태규의 영향을 받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로 이태규 박사를 새로 설립한 한국과학기술원 교수로 초청하자 이를 받아들여 1973년 영구 귀국해 20년 간 카이스트에서 세상을 떠나는 마지막 날까지 제자양성에 힘을 쏟다가 1992년 돌아가셨고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된 첫 번째 과학자가 되었다.  

교토대학은 물리학/화학 등의 기초과학 관련 일본 제 1대학으로 15개 대학원과 10개 학부, 13개 부설연구소, 박물관, 방사성연구소 등 17개의 교육시설과 세계적인 수준의 연구시설을 두루 갖추고 있다. (사진_교토대 의학 연구과 이수지)

 

교토대학의 자율, 상식을 벗어나는 것, 유일성을 추구하는 것
아시아에서 압도적으로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한 일본에서, 단일 대학으로는 가장 많은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한 교토대학의 학문적 근간에는 학생의 개성을 중요시하는 자유로운 학풍이 있다. 학생과 교수들이 하고 싶은 연구를 마음껏 하도록 장려하는 것이 가장 큰 장점으로 꼽히는 것이다.

교토대학은 2017년부터 색다른 시각을 지닌 연구자를 ‘괴짜’로 칭하고, 그들이 연구에 대해 소개하는 일명 ‘괴짜강좌’를 개설 중인데 일본 매체 ‘주간포스트’에 따르면, 교토대학은 학생들에게 ‘괴짜가 세상을 바꾼다’며 장려하는 분위기라고 한다. 

고정관념에 얽매이지 않는 ‘괴짜’야말로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하는 진실에 도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설령 실패를 반복해도 ‘오호, 그거 재미있겠는데?’라는 생각이 들면 교토대학측은 연구를 허용해준다는 것이다. 

교토대학교에 재임 중인 야마기와 주이치는 1975년 교토대학 이학부를 졸업한 후 혼자 아프리카에서 고릴라 생태연구를 시작했고 무려 10개월에 걸쳐서 고릴라와 함께 생활한 적도 있다고 한다. 그에게는 ‘별종’이라는 꼬리표가 따라붙는다고 한다. 

교토대학의 야마나카 교수가 노벨상을 받았을 때 아사히신문은 사설에서 노벨상 수상의 비결은에 대해 ‘다양한 개성을 살리는 장소가 있고 상식을 벗어난 테마가 나와도 어딘가 가능성이 있으면 평가를 해주고 기회를 준다. 

그러한 포용력이 큰 사람과 장소가 있어야만 독창적인 발견도 생긴다. 교토대학은 그런 곳이다’는 취지가 적혀있다. 2001년 노벨 화학상을 수상한 노요리 료지도 “반드시 일등을 할 필요는 없다. 그냥 유일한 연구자가 된다면 노벨상과 명예는 부수적으로 따라온다”는 말을 남겼다.

정보학연구과의 가와카미 히로시 교수는 불편하기 때문에 얻는 이익을 추구하는 ‘불편익’에 관한 연구를 하고 있다. 배리어프리(barrier free·무장애)나 자동화에 역행하는 설비를 굳이 사용하게 함으로써 유체와 정신의 노화를 방지하겠다는 발상이다. 

그는 한번 지나친 적이 있는 길은 점점 희미해지면서 3번 지나간 길은 안내가 사라지는 정보 소멸형 안내기, 단어를 외우면 뜻이 사라지는 전자사전 등을 개발했고, 교토대학 매점에는 2,3,5,7,11,13 등 소수만 표시된 눈금자를 판매하고 있다고 한다. 

서수 눈금자로 6㎝를 구하려면 11㎝에서 5㎝를 제외하는 식이다. 이러한 불편함이 뇌를 활성화 시킨다는 주장이다. 인간·환경학연구과의 사카이 사토시 교수는 “우리들의 연구가 너무 새로운 나머지 필요한 부품이나 관측 장치가 아직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사카이 교수는 “상식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다 보면 지금까지와 다른 발상을 할 수 없다. 지난해 노벨생리학상을 수상한 혼조 다스쿠 교수도 ‘학문의 상식’을 의심해왔기 때문에 획기적인 면역세포 연구로 이어졌다. 나 역시 유행을 좇아 연구하지 않는다. 재미있는 것을 할 뿐이다. 그런 ‘괴짜’를 키우는 토양이 교토대학에 있다”는 이야기다.

언급된 노벨생리의학상 수상자 혼조 다스쿠(本庶佑·76) 교토(京都)대 특별교수가 아사히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네이처나 사이언스에 나오는 연구 결과의 90%는 거짓말로, 10%만 10년 후에도 남는다. 쓰여 있는 것을 믿지 않고 내 머리로 생각해서 납득이 갈 때까지 (연구)한다는 것이 내 방식”이라고 자신의 연구관을 밝히기도 했다.

또한 그가 학창 시절부터 추구해 온 삶의 가치라고 말한 ‘여섯 개의 C’가 흥미롭다. “시대를 바꾸는 연구에는 ‘6개의 C’가 필요합니다. 호기심(Curiosity)과 용기(Courage), 도전(Challenge)과 확신(Confidence), 집중(Concentration)과 연속(Continuation)입니다.” 

교토대학 졸업식에서도 학생들은 졸업가운을 입지 않고 온갖 치장을 하고 나타난다. 마치 코스프레 현장을 방불케 하는데, 졸업식 사진이 인터넷에 올라올 때마다 “기발하다”, “유쾌하다”는 반응이 줄을 잇는다.

 

굳건한 전통, 실패해도 좋다는 자유로운 학풍, 장기적인 지원
교토대학은 위치한 곳은 도쿄가 있는 동일본이 아니다. 오사카에서 멀지 않은 서일본 지역이니 도쿄의 입장에서는 교토는 지방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교토는 역사적으로 1000년 넘게 그들의 천황이 존재했고, 한반도에서 전래된 문화를 일본으로 퍼뜨린 문화적인 중심지이다. 

대학이 위치하고 있는 교토시 자체의 매력은 천년 고도의 고풍스러움만이 아니다. 교토는 많은 일본 사람들에게 물질적으로 화려하지는 않지만 정신적으로 풍요한 생활공간을 의미한다. 도시 한가운데를 흐르는 하천이 오염되지 않고 옛날 그대로인 것도 매력적이다. 

소나기가 그친 다음 무지개가 보이기도 하고, 집 유리창에 붙어 눈을 끔뻑거리는 도롱뇽을 보면서 비 올 것을 예감하는 전원풍의 도시다. 고대 도시의 엄숙함과 문화적 유산, 현대도시의 아름다움이 한데 어우러진 도시다. 교토대학 캠퍼스는 대도시이면서도 자연환경을 갖춘 도시의 풍경들을 그대로 담고 있다. 시간을 갖고 연구에 집중할 수 있는 교토대학만의 학풍이 만들어진 이유이다.

도쿄(특별구) 인구는 약 850만 명, 교토는 약 150만 명에 불과하다. 게다가 교토는 산에 둘러싸인 분지로, 도시 공간은 도쿄에 비해 훨씬 좁지만 일본에서 가장 많은 문화유산이 남아 있는 역사적 문화도시이며 학술도시이기도 하다. 

일본이 자랑하는 고급문화의 발상지는 모두 교토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러한 자부심이 깃든 교토에서는 학생과 연구자는 언제나 시민들의 기대와 존경의 대상이며 교토대학의 굳건한 전통을 받쳐주는 것이다.  
 
한국에서 30년을 주재한 산케이신문 서울 특파원 구로다 가쓰히로 기자는 ‘일본은 한국처럼 뭐든 수도에 집중되어 있는 ‘일극(하나의 중심)주의’가 아니라 동서 양극으로 나눠져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일본 문화는 반드시 넘버원이 안 되어도 괜찮다고 할까, 아니 일등이 둘이어도 좋다는 구조다. 

가치가 양분된 동서양립의 타원형 문화로 교토대학이 바로 대표적인 사례라고 밝힌 바 있다. 그가 말하는 교토대학의 특징은 실패해도 좋다는 교토대학의 자유로운 학풍이다. 몇 년 동안이나 논문 하나도 내놓지 않고 연구만 계속하는 엉뚱한 연구자들도 있고 그것을 포용하는 연구 분위기가 있다. 

그만큼 개인의 독자성이 존중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한때의 실패나 낙오도 용서된다. 실패를 되풀이해도 쫓겨나지 않는다. 노력과 성공을 위해 시간을 준다.

노벨 생리의학상을 수상한 야마나카 교수는 젊은 시절 실패가 많아서 ‘쟈마나카’라는 야유를 받았다고 한다. “쟈마는 ‘방해’라든가 ‘지장’ ‘장애물’이라는 의미다. ‘쟈마나카’는 실패가 많아서 ‘방해가 되는 야마나카’ ‘장애물과 같은 야마나카’라는 뜻이다.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노력, 이것도 노벨상의 배경이다.” 

우리나라 의정부고등학교 졸업사진과 함께 종종 거론되는 교토대학 졸업식에서도 학생들은 졸업가운을 입지 않고 온갖 치장을 하고 나타난다. 마치 코스프레 현장을 방불케 하는데, 졸업식 사진이 인터넷에 올라올 때마다 “기발하다”, “유쾌하다”는 반응이 줄을 잇는다. 

교토대학의 교수들의 자유와 자율, “교토대학은 자유롭다. 무엇을 해도 좋다. 좋아하는 일을 해라. 모두 너희들의 판단에 맡기겠다. 단지 그 책임은 너희들이 져라” 한결같은 말이라고 한다. 

교토대학의 장기적이고 연구존중의 자세는 우리에게 놀라움을 보여준다. 학창시절 의사의 꿈을 위해 유학을 하다가 도전하고 싶은 연구가 생긴 야마나카 신야의,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고 연구 제안을 받아 주지도 않았던 ‘유도만능줄기세포 분야’. 그러나 연구센터를 설립하고 무려 20년 계획으로 지원한 교토대학에서 연구를 지속한 야마나카 신야는 결국 2012년 노벨 생리의학상을 수상했다. 

이러한 성과들은 ‘유일한 것이나 재미있는 것을 자율적으로 추구하라’며 출석도 체크하지 않는 교토대학이어서 가능했던 것은 아닐까. 

“국내 종합병원 의학대학의 장비들에 비하면 우리나라 최고라는 국립대학의 장비들은 한심해 보일 지경이었는데 교토대학에 와 보니 그마저도 허술하게 여겨져요.”

“한국에서 연구할 때는 지원과제에 대한 결과물 산출에 쫓겨 언제나 과중한 업무에 심신이 지쳤어요, 연구결과가 나와도 각종 이권에 휘말리던 상황을 이곳에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구요.”  
    
교토대학에서 박사과정을 준비 중인 한국인 유학생의 말에서 교토대학의 지원 방식을 짐작하게 하고, 우리나라가 처한 순수연구에 대한 슬픈 자화상이 느껴진다.

한반도를 통해 우수한 문물을 전해 받고, 에도시대부터는 유럽을 모태로 두고 과학·법률·문학·철학·역사·공학 등 최첨단 학문을 흡수한다는 생각아래 번역에 중점을 두는 전통을 가진 나라, 19세기 말에는 정부 차원에서 ‘번역국’을 두고 근대 기술 문명과 순수학문 분야까지 분야를 가리지 않고 수만 권을 번역해대는 나라, 1980년대부터 연구물을 영어로 번역해 발간하는 ‘교토학파’가 건재한 나라, 1950년대부터 국가와 민간이 손잡고 2만여 종의 번역 작품을 해외에 선보이는 나라, 번역을 통해 서양학문을 연구하던 배움의 시대를 뛰어넘어 자신들만의 학술연구 분야를 개척해 가는 나라, 결국 높은 번역 수준으로 강대국이 된 그 나라가 일본임을 떠올리면서 어쩐지 서운한 가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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