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의 대혁명 국회권력이 뒤집어지다”헌정사상 첫 정치세력 교체 ‘물갈이폭 사상최대’與大정국 양당구도 재편 “여성의원 약진”도 주목
17대 총선이 끝났다. 총선 결과 ‘정치세력’이 교체됐다. ‘혁명적’으로까지 일컬어지는 변화다. 그 변화는 유권자 선택, 투표의 결과다. 17대 총선에서 유권자는 낡은 정치의 퇴장과 새로운 정치의 틀을 만들 것을 강력하게 요구했다. 그 결과 헌정사상 처음으로 개혁을 추진하는 정당이 과반수를 차지했고, 진보정당이 제3당으로 원내에 진출했으며, 정치적 약자였던 여성의 의회진출이 확대되는 등 ‘의회권력의 교체’가 이뤄졌다. 역대 총선거와는 여러모로 다른양상을 보였던 이번 총선의 핵심을 정리해봤다.


국회권력 5.16이후 첫 판갈이
4·15 총선 결과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국회 권력의 교체와 양당 구도로의 재편이다. 열린우리당은 총선 전 47석의 ‘미니 여당’에서 안정의석을 확보한 제1당으로 올라섬으로써 국회를 장악했다.
지난 1997년 대선에서 김대중 대통령이 당선되면서 헌정사상 처음으로 정권이 교체된 이후 7년 만에 입법 권력의 중심도 개혁성향의 당으로 넘어간 것이다. 선거를 통한 국회 주도세력의 교체는 5·16 이후 처음이라는 분석이다.
국회가 뚜렷한 양당 구도로 변했다는 점도 주목된다.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의 의석이 전체의 90%를 차지했다. 61석이었던 민주당과 9석의 자민련은 한자릿수 의석을 확보하는 데 그쳐 ‘중간 지대’가 사라졌다. 다른 당의 의석을 모두 합친 것만큼 많은 의석을 열린우리당이 차지해 ‘캐스팅 보트’의 여지도 거의 사라졌다. 일각에서는 정치권이 보수와 진보의 양당 구도로 개편될 조짐으로 분석하기도 한다.
열린우리당의 확실한 제1당 확보로 노무현 대통령 정부와 여당은 국정을 안정적으로 운영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했다. 정부와 여당은 17대 국회에서 무슨 법안이든 조금만 노력하면 통과시킬 수 있게 됐다. 집권 2년차에 들어간 노대통령은 탄핵 심판이 정리된 이후 국회를 통해 개혁 프로그램을 본격적으로 가동할 것이 분명하다. 재신임이라는 족쇄에서 벗어난 노대통령은 강력하게 개혁 드라이브를 걸 것으로 보인다.
이를 위해 여당은 맨 먼저 탄핵 국면 해소에 나설 가능성이 높다. 월등한 다수 의석 확보로 야당이 가결시킨 노대통령 탄핵의 부당성과 노대통령의 신임이 확인됐다고 보고 탄핵 철회를 추진한다는 것이다. 정동영 의장 등이 이미 “16대 국회에서 벌어진 일은 16대에서 해결하고 17대를 새로이 맞자”고 한 바 있어 조만간 한나라당에 대표 회담을 제의한다는 방침이다.
총선 후 늘 있어온 여당발(發) 정계 개편은 없을 것이라는 게 일반적인 관측이다. 의석을 굳이 더 가져올 필요성이 없어졌기 때문이다. 대신 급속도로 세력이 약화된 야권 일부에서 소폭의 이합집산 가능성이 엿보인다. 박근혜 대표 체제가 공고해진 한나라당은 6월 중순 정기전당대회를 통해 당의 결집을 강화할 예정이다. 반면 궤멸 위기에 빠진 민주당은 선거 참패의 책임을 놓고 극심한 내홍을 겪을 것으로 보인다. 6월 전당대회 결과가 주목된다. 자민련 역시 당의 명맥은 유지했지만 진로를 다시 생각해봐야 할 판이다. 의원 개인들의 선택이 주목된다. 그러나 여당이 고려 중인 ‘선 탄핵철회 후 국회 개원’ 해법은 한나라당과의 충돌을 초래할 수 있다.
열린우리당은 정국 주도권을 확실히 잡았지만 동시에 부담도 안게 됐다. 한나라당의 발목잡기로 국정 수행이 어렵다는 논리에 더 이상 기댈 수 없게 됐다. 국정 수행 지지도가 30%대인 노대통령과 열린우리당의 정치력이 본격적으로 시험대에 올랐다.
‘선거혁명’ 물갈이폭 사상최대

‘환골탈태(換骨奪胎)’라는 말이 어색하지 않다. 17대 국회는 16대에선 볼 수 없었던 새로운 얼굴들로 채워질 것 같다. 지역구에 출마한 현역의원 중 불과 절반 정도가 민심의 냉정한 심판을 통과했기 때문이다. 앞서 15대 때는 의원정수 253명 중 현역의원 112명(44.3%)이 당선됐고, 16대 때는 의원정수 227명중 118명(52%)이 현역에 당선된 바 있다. 하지만 총선에 앞선 각당 공천과정에서 현역의원들이 무더기로 탈락하거나 불출마한 사실까지 감안하면 이번 17대 물갈이 폭은 역대 최대로 볼 수 있다.
각 당은 이미 공천과정에서 자의반 타의반으로 현역의원들의 옷을 벗겼다. 대선자금 등 정
치자금 파동과 탄핵정국으로 인해 정치권, 특히 현역의원들에 대한 국민들의 혐오감이 극에
달한다는 판단에서였다. 높은 인지도를 앞세운 지역구 경쟁력을 감안, 특별한 하자가 없으면
재신임되던 흐름을 뒤집은 공천이었고, 정치권 일각에선 ‘대학살’이란 말이 나올 정도였
다.
각 당의 공천혁명은 4·15총선에도 반영됐다. 한나라당 홍사덕 의원(경기 고양 일산 갑)과
목요상 의원(동두천·양주시) 등 중진의원들이 줄줄이 낙마했고, 김옥두 의원(장흥·영암)
등 동교동계와 김영삼 전 대통령의 대변인 격인 박종웅 의원이 고배를 마시면서 양김 시대
의 종언을 고했다. 지구당을 없애고, 정당연설회 및 합동연설회 등의 폐지를 골자로 하는 개
정 선거법도 인적청산을 가속화하는 촉매제로 작용했다. 반면 30, 40대의 젊은 후보들이 대
거 약진했고, 4·15 총선은 기성 정치지형을 바꾸는 무대가 됐다.
강운택 숭실대 교수는 이같은 변화에 대해 “연령적으로 3김과 함께 정치를 이끌었던 인사
들과 그들의 부정적인 정치관행이 퇴장하면서 국민들이 새로운 인물의 출현을 기대하고 있
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50여년의 헌정사에서 처음으로 민주노동당이라는 진보정당이 원
내 진출의 숙원을 이룬 것도 이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벌써부터 17대 국회에선 개
혁입법·여성보호를 위한 입법이 양산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정대화 상지대 교수(정치학과)는 “부패정치, 지역주의 정치, 탄핵에 대한 국민들의 심판이
아주 준열하게 나타났고, 그 결과 국민들이 바라는 체제내 정치권 물갈이가 실현됐다”면서
“각당 신진세력이 대거 등장하는 등 정치권의 상당한 변화가 불가피해졌다”고 말했다.


투표자 33% “지지정당·후보
달랐다”

이번 17대 총선에서 전체 투표자의 10명 중 3명은 1인2표제에 따른 지지 정당과 지지 후보
의 소속 정당이 달랐던 것으로 나타났다. 한국갤럽이 투표에 참가한 투표자 1686명을 상대
로 한 전화 사후조사에 따르면, 지지 후보의 정당과 지지 정당이 같았던 투표자는 60.3%,
달랐던 투표자는 32.9%였다. 나머지 6.8%는 무응답 또는 무소속 후보에게 투표한 경우였다.
특히 정당투표에서 민노당을 찍은 투표자의 대다수인 78.3%는 지역구 후보로는 다른 정당
소속 후보를 선택했다고 응답, 민노당이 1인2표제 도입에 따른 이익을 가장 많이 본 것으로
나타났다. 정당투표에서 민주당 지지층은 52.9%, 한나라당 지지층은 28.1%, 열린우리당 지
지층은 23.4%가 다른 정당 소속의 지역구 후보에게 투표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번 선거에서 지지 후보의 결정에 영향을 준 요인으로는 ‘탄핵 가결’(51.1%)이 가장 많이 꼽혔고, 다음은 ‘정동영 의장의 노인 폄하발언’(14%), ‘각 정당 대표의 선거운동’(13.7%), ‘낙선 후보자 발표’(3.2%) 등이었다. 탄핵에 대해선 열린우리당 후보 지지층의 75.9%가 가장 큰 영향을 받았다고 답한 반면, 한나라당 후보 지지층은 27.9%에 그쳤다.
이번 총선을 지휘했던 각 정당의 사령탑에 대한 호감도에서는 한나라당 박근혜 대표 36.4%, 열린우리당 정동영 의장 26.1%, 민노당 권영길 대표 13.8%, 민주당 추미애 선대위원장 6.3%, 자민련 김종필 총재 1.1% 등의 순이었다. 정 의장의 ‘노인 폄하발언’이 알려지기 전인 지난 3월 30일 갤럽조사에서는 정 의장 37.2%, 박 대표 28.4%, 권 대표 7.6%, 추 위원장 5.7%, 김 총재 0.5% 순이었다.
최종적으로 지지 후보를 결정하는 데 있어 우선적으로 고려한 사항에 대해선 ‘정당’(44.4%)과 ‘인물’(43.1%)이 비슷했다. 공식 선거전 도입 이전인 3월 30일 갤럽조사에서는 ‘정당’(57.2%)이 ‘인물’(35.3%)보다 훨씬 높았지만 선거기간 ‘후보 개인의 능력’을 참조한 유권자가 늘어난 것으로 파악됐다.
후보 결정시기에 대한 질문에서는 총선 한 달 전부터 결정했다는 투표자가 40.4%로 가장 많았고, 2∼3주일 전은 12%, 1주일 전은 17.9%, 2∼3일 전은 17.4%, 투표 당일은 11.1%였다. 이번에 투표 한 달 전에 지지 후보를 결정했다는 비율은 1996년 15대 총선의 32.7%, 2000년 16대 총선의 35.4%보다 많아지는 추세를 보여 유권자들의 지지후보 결정시기가 최근 들어 빨라지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한편, 이번 선거과정이 전체적으로 ‘공명했다’(78.7%)는 긍정적 평가가 ‘공명하지 못했다’(8.5%)보다 훨씬 높았다. 선거과정이 ‘공명했다’는 평가는 지난 15대의 53%와 16대의 51%에 비해 훨씬 높아졌다. 이 조사의 최대허용 표본오차는 95% 신뢰수준에서 ±2.4%포인트다.



한국 여성의원 비율 사상 최다
4월 총선에서 여성의원들이 대거 국회에 진출함에 따라 한국의 여성의원 비율도 세계 평균 수준에 근접하게 됐다. 한국의 여성의원은 모두 39명으로 전체 의석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5.5%에서 13%로 급상승, 헌정사상 처음으로 두자릿수를 기록하면서 국제의회연맹(IPU)이 집계하는 국가별 여성의원 순위에서도 30여 계단이 뛰어오를 것으로 예상된다.
한국은 IPU가 발표한 3월31일 현재 순위에서는 총선 결과가 반영되지 않아 전제 182개국 가운데 온두라스, 요르단과 함께 101위에 머물러 있으나 이달말 발표될 최신 집계에서는 60위권 진입이 유력시된다.
한국의 여성 의원 비율은 57위인 미국(14.3%)보다 뒤지지만 60위인 몰도바(12.9%)보다 높다. 공동 58위인 아일랜드와 바베이도스, 세인트 키츠 앤드 네비스가 각각 13.3%이고 59위인 아프리카의 감비아는 13.2%를 기록하고 있다.
한국의 여성의원 비율은 10%선을 밑돌아 회교국가들과 비슷한 수준에 그쳤으나 이번 총선 결과로 일본(94위. 7.1%), 프랑스(12.2%), 이탈리아(11.5%))을 앞서게 된 것은 물론 아시아 평균(14.9%)와 전세계 평균(15.5%)에도 근접하고 있다. 그러나 아직도 세계 평균을 웃도는 국가들이 54개국이나 된다는 점에서 정치권의 남녀평등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갈 길이 먼 셈이다.
1위 국가는 아프리카의 르완다로 48.8%이며 그 다음이 스웨덴(45.3%), 덴마크(38.0%), 핀란드(37.5%), 네덜란드(36.7%), 노르웨이(36.4%), 쿠바(36.0%), 스페인(36.0%), 벨기에(35.3%), 코스타리카(35.1%), 오스트리아(33.9%) 순이다.
상위권은 전통적으로 북유럽 국가들이 독점하고 있었지만 르완다가 내전을 거치면서 여성들에 대한 획기적인 의석 할당제를 실시한 덕분에 지난해 스웨덴을 제치고 세계 1위가 됐으며 3월에 총선을 치른 스페인이 10위안에 들어온 것도 주목된다.

영원한 미제 지역주의 타파 가능성

‘지역’. 역대 선거에서 투표 행위를 규정한 최대 요소다. 선거 승패는 주로 지역에 좌우됐다. 선거 때마다 지역주의 타파가 명분이었지만, 늘 미제로 남았다. 17대 총선에서도 지역주의는 화두였고 숙제였다. PK(부산·경남·울산)의 표심 변동이 희망을 재는 바로미터다. 지난해 12월28일 경향신문·현대리서치 조사에서 한나라당과 열린우리당 총선지지도는 32.8% 대 14.9%였다. 탄핵안 가결 직후 조사에서는 24.7% 대 29.2%로 뒤집혔다. ‘박풍’과 ‘노풍’ 논란이 거세진 선거 막판 경향신문·ANR조사(4월10일)에서는 30.0% 대 27.4%로 다시 역전됐다. 총선 결과는 PK 41석 중 한나라당 34석, 열린우리당 4석. 정당투표에서는 한나라당이 46.21%, 열린우리당이 32.12%를 얻었다.
역대 PK 선거 결과에 비추면 상당한 변화다. 14, 15, 16대 총선에서는 한나라당과 전신인 신한국당이 사실상 싹쓸이했다. 16대 대선 당시 이회창 후보와 이곳 출신 노무현 후보의 PK 득표율 차이는 35.90% 포인트였다. 이번에 한나라당과 열린우리당 격차는 13.09% 포인트다.
PK 선거는 다각적 요인이 작동한 결과다. 전문가들은 먼저 탄핵이라는 거대 이슈가 지역주의적 변수를 일정부분 상쇄시켰다고 진단한다. 탄핵을 고리로 더욱 부각된 ‘세대와 이념적 요소’가 지역 요소의 패권적 영향력을 약화시켰다. 아울러 3김 정당과 달리 특정지역으로 고착되지 않은 열린우리당의 색깔이 영향을 미쳤다. 열린우리당이 한나라당에 비해 지역별 지지도 편차(표)가 덜하고 상대적으로 전국적 득표력을 보인 것도 이런 색깔 덕이다.
지역주의 극복의 희망은 민주노동당에서 더욱 확연하게 감지된다. 전국 정당득표율이 13.0%인 민주노동당은 영·호남 가릴 것 없이 10%대의 가장 고른 지지율을 기록했다. 감성, 이벤트 정치 홍수 속에서 민주노동당이 유일하게 정책 선거를 펼친 측면을 감안하면 유의미한 결과다. 이필상 교수(고려대)는 “정책을 표방하면서 전국에서 골고루 지지를 받은 유일한전국정당”이라고 평가했다.
호남과 충청에 강한 연을 갖고 있는 민주당과 자민련의 몰락은 이 같은 시대 흐름을 놓치고 퇴행적 지역주의 연고에만 집착한 운명의 극적 결론이다.
내용적 변화는 상당하지만 선거 결과는 지역주의적이다. 한나라당은 호남에서 전멸했고, 열린우리당은 TK에서 전멸했다. 열린우리당이 경남에서 얻은 2석은 노무현 대통령 고향(김해)이라는 소지역주의적 측면이 내재한다.
탄핵정국 아래에서 지역주의가 큰 영향을 못미칠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박풍’과 TK지역의 역사적 특수성이 맞물리면서 바람이 불고 TK가 올라가자 호남이 올라가고, 다시 PK가 뜨는 연쇄작용이 일어났다. 최종적으로 지역주의는 ‘깨질 것 같다가 깨지지 않았다’. 탄핵이라는 거대 이슈에도 불구, 지역주의가 다시 살아난 점은 지역적 균열이 언제든 부활할 수 있음을 보여준 것이다.

3金시대의 종언

이번 총선의 특징중의 하나중 빼놓을 수 없는 것이 김종필 자민련 총재의 낙선이었다.
“그동안 은인자중하던 군부는 마침내 오늘 새벽 미명을 기해서 백척간두에 선 조국을 구하기 위해 총 궐기했습니다.” 1961년 5월16일 새벽 5시. 쿠데타 소식을 전하는 KBS 박종세 아나운서의 흥분된 목소리가 라디오로 흘러나왔다. 당시 35세의 예비역 육군 중령이던 김종필 자민련 총재가 초안을 잡은 원고로, 그가 한국 정치사 전면에 나섰음을 알리는 것이었다.
그로부터 42년 11개월 만이자, 군부가 5·16의 빌미를 삼았던 4·19 혁명 44주년 기념일인 19일. 김종필 총재가 정계 은퇴 의사를 밝혔다. 17대 총선 당선자 간담회에서였다. “오늘로 총재직을 그만두고 정계를 떠나겠다.” 등장 때와 달리 기자회견도, 발표문도 없었다. 배석했던 당직자가 “은퇴는 아니다”라고 부연하자 “사족을 달지 말라”고 잘랐다.
김총재는 간담회에서 회한과 소회를 가감없이 털어놨다. “패전 장수가 할 말이 뭐 있겠느냐. 국민의 선택에 조건없이 승복한다. 세상은 옳든 옳지 않든 바뀌었다. 이 나라에 불안요인이 있는데 시간과 더불어 어떻게 대처할지 모르겠지만 패장이 무슨 할 말이 있겠느냐”고 했다.
내각제를 실현하지 못한 아쉬움도 표시했다. “43년간 정계에 몸 담아왔고 이제 완전히 연소돼 재가 되었다. 일찌감치 떠날 수 있었지만 무언가 세워놓고 떠나고 싶은 욕심이 있었다.”
김총재는 한국 현대사와 궤를 같이한 ‘정치적 풍운아’였다. 80년 이전에는 박정희 대통령과 주변 인사들의 견제 속에 영광과 좌절을 맛봤다. 중앙정보부장과 국무총리, 공화당 당의장이란 권력의 중심에 있으면서도 ‘자의반 타의반’의 3차례 강제외유를 하는 등 끝내 1인자의 자리에 오르지 못했다. 80년 출범한 전두환 정권 때는 부정축재자로 지목돼 미국으로 쫓겨나기도 했다.
87년 민주화 이후 재기했지만 3당 합당과 DJP 연합을 통해 김영삼, 김대중 정권을 탄생시킨 ‘킹 메이커’ 역할에 만족했다. 이 때문에 그는 ‘영원한 2인자’로 불리기도 했다. 김총재에 대한 시각은 엇갈린다. 근대화의 기수이자 멋을 아는 정치인(김총재는 그림과 글씨에 일가견이 있다)이라는 긍정적 평가와 ‘처세의 달인’ ‘시대 흐름을 읽지 못한, 지역주의 정치인’이라는 비판이 공존한다.
김총재는 다음주쯤 일본을 찾아 휴식을 취할 것으로 알려졌다. 구름의 자유로움을 좋아해 지은 아호 ‘운정(雲庭)’처럼, 슬슬 구름의 뜰에서 여생을 보낼 채비를 하고 있는 듯 보인다.


선거판 뒷얘기 야당 석권… 지역경제 걱정 ▲ “정부지원사업 없던일 될라”
대구시는 ‘한나라당 싹쓸이’가 자칫 지역경제 활성화에 차질을 줄까 우려하고 있다.
시는 “정부예산 등을 지원받으려면 여당의원을 통한 로비가 효율적인데 야당 일색으로 채워져 아쉽다”면서 여당의원을 1명도 배출하지 못한 데 대해 안타까움을 토로.
대구시 고위관계자는 “정부지원이 절실한 DKIST(대구경북과학기술연구원)와 한방바이오밸리 조성 등 굵직한 현안이 주춤거리지 않을까 걱정된다”면서 “지자체 차원에서 정부로비를 강화하겠지만 야당의원들도 지역경제 회생에 적극 나서달라”고 주문했다.

▲ 원군얻은 농민회·전공노 희색

민주노동당 대약진의 중심지인 경남에서는 권영길 대표와 강기갑 전국농민회총연맹 부의장의 지역구나 비례대표 당선 등에 힘입어 공무원노조의 합법화 운동과 농민회 쌀개방 반대투쟁 등이 더욱 힘을 받는 분위기다. 공무원노조 경남지역본부는 19일 도청 광장에서 본부 출범 2주년 기념식 및 부당징계 규탄대회를 가졌다.
노조 이병하 경남본부장은 “민주노동당 지지선언으로 비롯된 노조 집행부에 대한 징계 백지화와 노조 합법화를 위해 민주노동당과의 연대 투쟁을 강화하겠다”고 강조했다. 전국농민회 경남도연맹도 쌀 개방 반대를 위한 농민 투표 등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 “민심결집 사회단체 나서야”

포항지역 사회단체들이 선거기간 중 후보 자질과 정책을 활발히 검증한 것과 달리 선거 이후 드러난 각종 문제점와 갈라진 민심을 하나로 결집시키려는 노력을 보이지 않고 있다. 선거가 끝난 지 4일째인 19일까지 후보별 당선사례와 유권자 인사말이 잇따라 발표됐지만 정작 선거과정과 이후의 문제점과 개선점을 객관적 입장에서 지적해야 할 사회단체의 입장표명은 전혀 없다. 이들이 선거기간 중 후보별 여성정책 비교와 고교평준화에 대한 찬반, 공약내용 및 후보자질을 꼼꼼하게 비교검토해 그 결과를 유권자들에게 알린 것과는 너무나 대조적이었다. 박병철씨(35·포항시 남구)는 “후보 선택에 사회단체들의 후보검증 활동이 큰 보탬이 됐지만 선거이후 흐트러진 사회분위기를 다잡는 활동에는 소홀한 것 같다”고 꼬집었다.

▲울산정가 다양한 목소리 기대

울산은 한나라당 3석, 열린우리당·민주노동당·국민통합21 각 1석으로 고른 의석분포를 보였다. 공단도시로 발전하면서 팔도 사람 전시장이라 불린 울산의 인구조성과 비교적 낮은 평균연령 때문에 유권자의 표심이 다양하게 반영됐다는 평이다.
전통적 한나라당 아성이 무너지고 민주노동당과 열린우리당에게 1석씩 내준 것과 민주노동당 비례대표인 이영순 전 동구청장이 여성으로 당선된 것도 특이하다.
분할구도로 인해 지역정가가 한나라당 일색이던 것에서 다양한 목소리가 나올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열린우리당 강길부 당선자는 당선소감에서 벌써 “울주군의 미래를 소수의 정책결정자에게만 맡기지 말라”며 독주를 견제하는 목소리를 냈다.

국회권력 5.16이후 첫 판갈이

4·15 총선 결과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국회 권력의 교체와 양당 구도로의 재편이다. 열린우리당은 총선 전 47석의 ‘미니 여당’에서 안정의석을 확보한 제1당으로 올라섬으로써 국회를 장악했다.
지난 1997년 대선에서 김대중 대통령이 당선되면서 헌정사상 처음으로 정권이 교체된 이후 7년 만에 입법 권력의 중심도 개혁성향의 당으로 넘어간 것이다. 선거를 통한 국회 주도세력의 교체는 5·16 이후 처음이라는 분석이다.
국회가 뚜렷한 양당 구도로 변했다는 점도 주목된다.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의 의석이 전체의 90%를 차지했다. 61석이었던 민주당과 9석의 자민련은 한자릿수 의석을 확보하는 데 그쳐 ‘중간 지대’가 사라졌다. 다른 당의 의석을 모두 합친 것만큼 많은 의석을 열린우리당이 차지해 ‘캐스팅 보트’의 여지도 거의 사라졌다. 일각에서는 정치권이 보수와 진보의 양당 구도로 개편될 조짐으로 분석하기도 한다.
열린우리당의 확실한 제1당 확보로 노무현 대통령 정부와 여당은 국정을 안정적으로 운영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했다. 정부와 여당은 17대 국회에서 무슨 법안이든 조금만 노력하면 통과시킬 수 있게 됐다. 집권 2년차에 들어간 노대통령은 탄핵 심판이 정리된 이후 국회를 통해 개혁 프로그램을 본격적으로 가동할 것이 분명하다. 재신임이라는 족쇄에서 벗어난 노대통령은 강력하게 개혁 드라이브를 걸 것으로 보인다.
이를 위해 여당은 맨 먼저 탄핵 국면 해소에 나설 가능성이 높다. 월등한 다수 의석 확보로 야당이 가결시킨 노대통령 탄핵의 부당성과 노대통령의 신임이 확인됐다고 보고 탄핵 철회를 추진한다는 것이다. 정동영 의장 등이 이미 “16대 국회에서 벌어진 일은 16대에서 해결하고 17대를 새로이 맞자”고 한 바 있어 조만간 한나라당에 대표 회담을 제의한다는 방침이다.
총선 후 늘 있어온 여당발(發) 정계 개편은 없을 것이라는 게 일반적인 관측이다. 의석을 굳이 더 가져올 필요성이 없어졌기 때문이다. 대신 급속도로 세력이 약화된 야권 일부에서 소폭의 이합집산 가능성이 엿보인다. 박근혜 대표 체제가 공고해진 한나라당은 6월 중순 정기 전당대회를 통해 당의 결집을 강화할 예정이다. 반면 궤멸 위기에 빠진 민주당은 선거 참패의 책임을 놓고 극심한 내홍을 겪을 것으로 보인다. 6월 전당대회 결과가 주목된다. 자민련 역시 당의 명맥은 유지했지만 진로를 다시 생각해봐야 할 판이다. 의원 개인들의 선택이 주목된다. 그러나 여당이 고려 중인 ‘선 탄핵철회 후 국회 개원’ 해법은 한나라당과의 충돌을 초래할 수 있다.
열린우리당은 정국 주도권을 확실히 잡았지만 동시에 부담도 안게 됐다. 한나라당의 발목잡기로 국정 수행이 어렵다는 논리에 더 이상 기댈 수 없게 됐다. 국정 수행 지지도가 30%대인 노대통령과 열린우리당의 정치력이 본격적으로 시험대에 올랐다.
‘선거혁명’ 물갈이폭 사상최대

‘환골탈태(換骨奪胎)’라는 말이 어색하지 않다. 17대 국회는 16대에선 볼 수 없었던 새로운 얼굴들로 채워질 것 같다. 지역구에 출마한 현역의원 중 불과 절반 정도가 민심의 냉정한 심판을 통과했기 때문이다. 앞서 15대 때는 의원정수 253명 중 현역의원 112명(44.3%)이 당선됐고, 16대 때는 의원정수 227명중 118명(52%)이 현역에 당선된 바 있다. 하지만 총선에 앞선 각당 공천과정에서 현역의원들이 무더기로 탈락하거나 불출마한 사실까지 감안하면 이번 17대 물갈이 폭은 역대 최대로 볼 수 있다.
각 당은 이미 공천과정에서 자의반 타의반으로 현역의원들의 옷을 벗겼다. 대선자금 등 정치자금 파동과 탄핵정국으로 인해 정치권, 특히 현역의원들에 대한 국민들의 혐오감이 극에 달한다는 판단에서였다. 높은 인지도를 앞세운 지역구 경쟁력을 감안, 특별한 하자가 없으면 재신임되던 흐름을 뒤집은 공천이었고, 정치권 일각에선 ‘대학살’이란 말이 나올 정도였다.
각 당의 공천혁명은 4·15총선에도 반영됐다. 한나라당 홍사덕 의원(경기 고양 일산 갑)과 목요상 의원(동두천·양주시) 등 중진의원들이 줄줄이 낙마했고, 김옥두 의원(장흥·영암) 등 동교동계와 김영삼 전 대통령의 대변인 격인 박종웅 의원이 고배를 마시면서 양김 시대의 종언을 고했다. 지구당을 없애고, 정당연설회 및 합동연설회 등의 폐지를 골자로 하는 개정 선거법도 인적청산을 가속화하는 촉매제로 작용했다. 반면 30, 40대의 젊은 후보들이 대거 약진했고, 4·15 총선은 기성 정치지형을 바꾸는 무대가 됐다.
강운택 숭실대 교수는 이같은 변화에 대해 “연령적으로 3김과 함께 정치를 이끌었던 인사들과 그들의 부정적인 정치관행이 퇴장하면서 국민들이 새로운 인물의 출현을 기대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50여년의 헌정사에서 처음으로 민주노동당이라는 진보정당이 원내 진출의 숙원을 이룬 것도 이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벌써부터 17대 국회에선 개혁입법·여성보호를 위한 입법이 양산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정대화 상지대 교수(정치학과)는 “부패정치, 지역주의 정치, 탄핵에 대한 국민들의 심판이 아주 준열하게 나타났고, 그 결과 국민들이 바라는 체제내 정치권 물갈이가 실현됐다”면서 “각당 신진세력이 대거 등장하는 등 정치권의 상당한 변화가 불가피해졌다”고 말했다.

투표자 33% “지지정당·후보 달랐다”

이번 17대 총선에서 전체 투표자의 10명 중 3명은 1인2표제에 따른 지지 정당과 지지 후보의 소속 정당이 달랐던 것으로 나타났다. 한국갤럽이 투표에 참가한 투표자 1686명을 상대로 한 전화 사후조사에 따르면, 지지 후보의 정당과 지지 정당이 같았던 투표자는 60.3%, 달랐던 투표자는 32.9%였다. 나머지 6.8%는 무응답 또는 무소속 후보에게 투표한 경우였다.
특히 정당투표에서 민노당을 찍은 투표자의 대다수인 78.3%는 지역구 후보로는 다른 정당 소속 후보를 선택했다고 응답, 민노당이 1인2표제 도입에 따른 이익을 가장 많이 본 것으로 나타났다. 정당투표에서 민주당 지지층은 52.9%, 한나라당 지지층은 28.1%, 열린우리당 지지층은 23.4%가 다른 정당 소속의 지역구 후보에게 투표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번 선거에서 지지 후보의 결정에 영향을 준 요인으로는 ‘탄핵 가결’(51.1%)이 가장 많이 꼽혔고, 다음은 ‘정동영 의장의 노인 폄하발언’(14%), ‘각 정당 대표의 선거운동’(13.7%), ‘낙선 후보자 발표’(3.2%) 등이었다. 탄핵에 대해선 열린우리당 후보 지지층의 75.9%가 가장 큰 영향을 받았다고 답한 반면, 한나라당 후보 지지층은 27.9%에 그쳤다.
이번 총선을 지휘했던 각 정당의 사령탑에 대한 호감도에서는 한나라당 박근혜 대표 36.4%, 열린우리당 정동영 의장 26.1%, 민노당 권영길 대표 13.8%, 민주당 추미애 선대위원장 6.3%, 자민련 김종필 총재 1.1% 등의 순이었다. 정 의장의 ‘노인 폄하발언’이 알려지기 전인 지난 3월 30일 갤럽조사에서는 정 의장 37.2%, 박 대표 28.4%, 권 대표 7.6%, 추 위원장 5.7%, 김 총재 0.5% 순이었다.
최종적으로 지지 후보를 결정하는 데 있어 우선적으로 고려한 사항에 대해선 ‘정당’(44.4%)과 ‘인물’(43.1%)이 비슷했다. 공식 선거전 도입 이전인 3월 30일 갤럽조사에서는 ‘정당’(57.2%)이 ‘인물’(35.3%)보다 훨씬 높았지만 선거기간 ‘후보 개인의 능력’을 참조한 유권자가 늘어난 것으로 파악됐다.
후보 결정시기에 대한 질문에서는 총선 한 달 전부터 결정했다는 투표자가 40.4%로 가장 많았고, 2∼3주일 전은 12%, 1주일 전은 17.9%, 2∼3일 전은 17.4%, 투표 당일은 11.1%였다. 이번에 투표 한 달 전에 지지 후보를 결정했다는 비율은 1996년 15대 총선의 32.7%, 2000년 16대 총선의 35.4%보다 많아지는 추세를 보여 유권자들의 지지후보 결정시기가 최근 들어 빨라지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한편, 이번 선거과정이 전체적으로 ‘공명했다’(78.7%)는 긍정적 평가가 ‘공명하지 못했다’(8.5%)보다 훨씬 높았다. 선거과정이 ‘공명했다’는 평가는 지난 15대의 53%와 16대의 51%에 비해 훨씬 높아졌다. 이 조사의 최대허용 표본오차는 95% 신뢰수준에서 ±2.4%포인트다.

한국 여성의원 비율 사상 최다

4월 총선에서 여성의원들이 대거 국회에 진출함에 따라 한국의 여성의원 비율도 세계 평균 수준에 근접하게 됐다. 한국의 여성의원은 모두 39명으로 전체 의석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5.5%에서 13%로 급상승, 헌정사상 처음으로 두자릿수를 기록하면서 국제의회연맹(IPU)이 집계하는 국가별 여성의원 순위에서도 30여 계단이 뛰어오를 것으로 예상된다.
한국은 IPU가 발표한 3월31일 현재 순위에서는 총선 결과가 반영되지 않아 전제 182개국 가운데 온두라스, 요르단과 함께 101위에 머물러 있으나 이달말 발표될 최신 집계에서는 60위권 진입이 유력시된다.
한국의 여성 의원 비율은 57위인 미국(14.3%)보다 뒤지지만 60위인 몰도바(12.9%)보다 높다. 공동 58위인 아일랜드와 바베이도스, 세인트 키츠 앤드 네비스가 각각 13.3%이고 59위인 아프리카의 감비아는 13.2%를 기록하고 있다.
한국의 여성의원 비율은 10%선을 밑돌아 회교국가들과 비슷한 수준에 그쳤으나 이번 총선 결과로 일본(94위. 7.1%), 프랑스(12.2%), 이탈리아(11.5%))을 앞서게 된 것은 물론 아시아 평균(14.9%)와 전세계 평균(15.5%)에도 근접하고 있다. 그러나 아직도 세계 평균을 웃도는 국가들이 54개국이나 된다는 점에서 정치권의 남녀평등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갈 길이 먼 셈이다.
1위 국가는 아프리카의 르완다로 48.8%이며 그 다음이 스웨덴(45.3%), 덴마크(38.0%), 핀란드(37.5%), 네덜란드(36.7%), 노르웨이(36.4%), 쿠바(36.0%), 스페인(36.0%), 벨기에(35.3%), 코스타리카(35.1%), 오스트리아(33.9%) 순이다.
상위권은 전통적으로 북유럽 국가들이 독점하고 있었지만 르완다가 내전을 거치면서 여성들에 대한 획기적인 의석 할당제를 실시한 덕분에 지난해 스웨덴을 제치고 세계 1위가 됐으며 3월에 총선을 치른 스페인이 10위안에 들어온 것도 주목된다.

영원한 미제 지역주의 타파 가능성

‘지역’. 역대 선거에서 투표 행위를 규정한 최대 요소다. 선거 승패는 주로 지역에 좌우됐다. 선거 때마다 지역주의 타파가 명분이었지만, 늘 미제로 남았다. 17대 총선에서도 지역주의는 화두였고 숙제였다. PK(부산·경남·울산)의 표심 변동이 희망을 재는 바로미터다. 지난해 12월28일 경향신문·현대리서치 조사에서 한나라당과 열린우리당 총선지지도는 32.8% 대 14.9%였다. 탄핵안 가결 직후 조사에서는 24.7% 대 29.2%로 뒤집혔다. ‘박풍’과 ‘노풍’ 논란이 거세진 선거 막판 경향신문·ANR조사(4월10일)에서는 30.0% 대 27.4%로 다시 역전됐다. 총선 결과는 PK 41석 중 한나라당 34석, 열린우리당 4석. 정당투표에서는 한나라당이 46.21%, 열린우리당이 32.12%를 얻었다.
역대 PK 선거 결과에 비추면 상당한 변화다. 14, 15, 16대 총선에서는 한나라당과 전신인 신한국당이 사실상 싹쓸이했다. 16대 대선 당시 이회창 후보와 이곳 출신 노무현 후보의 PK 득표율 차이는 35.90% 포인트였다. 이번에 한나라당과 열린우리당 격차는 13.09% 포인트다.
PK 선거는 다각적 요인이 작동한 결과다. 전문가들은 먼저 탄핵이라는 거대 이슈가 지역주의적 변수를 일정부분 상쇄시켰다고 진단한다. 탄핵을 고리로 더욱 부각된 ‘세대와 이념적 요소’가 지역 요소의 패권적 영향력을 약화시켰다. 아울러 3김 정당과 달리 특정지역으로 고착되지 않은 열린우리당의 색깔이 영향을 미쳤다. 열린우리당이 한나라당에 비해 지역별 지지도 편차(표)가 덜하고 상대적으로 전국적 득표력을 보인 것도 이런 색깔 덕이다.
지역주의 극복의 희망은 민주노동당에서 더욱 확연하게 감지된다. 전국 정당득표율이 13.0%인 민주노동당은 영·호남 가릴 것 없이 10%대의 가장 고른 지지율을 기록했다. 감성, 이벤트 정치 홍수 속에서 민주노동당이 유일하게 정책 선거를 펼친 측면을 감안하면 유의미한 결과다. 이필상 교수(고려대)는 “정책을 표방하면서 전국에서 골고루 지지를 받은 유일한 전국정당”이라고 평가했다.
호남과 충청에 강한 연을 갖고 있는 민주당과 자민련의 몰락은 이 같은 시대 흐름을 놓치고 퇴행적 지역주의 연고에만 집착한 운명의 극적 결론이다.
내용적 변화는 상당하지만 선거 결과는 지역주의적이다. 한나라당은 호남에서 전멸했고, 열린우리당은 TK에서 전멸했다. 열린우리당이 경남에서 얻은 2석은 노무현 대통령 고향(김해)이라는 소지역주의적 측면이 내재한다.
탄핵정국 아래에서 지역주의가 큰 영향을 못미칠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박풍’과 TK지역의 역사적 특수성이 맞물리면서 바람이 불고 TK가 올라가자 호남이 올라가고, 다시 PK가 뜨는 연쇄작용이 일어났다. 최종적으로 지역주의는 ‘깨질 것 같다가 깨지지 않았다’.
탄핵이라는 거대 이슈에도 불구, 지역주의가 다시 살아난 점은 지역적 균열이 언제든 부활할 수 있음을 보여준 것이다.

3金시대의 종언

이번 총선의 특징중의 하나중 빼놓을 수 없는 것이 김종필 자민련 총재의 낙선이었다.
“그동안 은인자중하던 군부는 마침내 오늘 새벽 미명을 기해서 백척간두에 선 조국을 구하기 위해 총 궐기했습니다.” 1961년 5월16일 새벽 5시. 쿠데타 소식을 전하는 KBS 박종세 아나운서의 흥분된 목소리가 라디오로 흘러나왔다. 당시 35세의 예비역 육군 중령이던 김종필 자민련 총재가 초안을 잡은 원고로, 그가 한국 정치사 전면에 나섰음을 알리는 것이었다.
그로부터 42년 11개월 만이자, 군부가 5·16의 빌미를 삼았던 4·19 혁명 44주년 기념일인 19일. 김종필 총재가 정계 은퇴 의사를 밝혔다. 17대 총선 당선자 간담회에서였다. “오늘로 총재직을 그만두고 정계를 떠나겠다.” 등장 때와 달리 기자회견도, 발표문도 없었다. 배석했던 당직자가 “은퇴는 아니다”라고 부연하자 “사족을 달지 말라”고 잘랐다.
김총재는 간담회에서 회한과 소회를 가감없이 털어놨다. “패전 장수가 할 말이 뭐 있겠느냐. 국민의 선택에 조건없이 승복한다. 세상은 옳든 옳지 않든 바뀌었다. 이 나라에 불안요인이 있는데 시간과 더불어 어떻게 대처할지 모르겠지만 패장이 무슨 할 말이 있겠느냐”고 했다.
내각제를 실현하지 못한 아쉬움도 표시했다. “43년간 정계에 몸 담아왔고 이제 완전히 연
소돼 재가 되었다. 일찌감치 떠날 수 있었지만 무언가 세워놓고 떠나고 싶은 욕심이 있었
다.”
김총재는 한국 현대사와 궤를 같이한 ‘정치적 풍운아’였다. 80년 이전에는 박정희 대통령과 주변 인사들의 견제 속에 영광과 좌절을 맛봤다. 중앙정보부장과 국무총리, 공화당 당의장이란 권력의 중심에 있으면서도 ‘자의반 타의반’의 3차례 강제외유를 하는 등 끝내 1인자의 자리에 오르지 못했다. 80년 출범한 전두환 정권 때는 부정축재자로 지목돼 미국으로 쫓겨나기도 했다.
87년 민주화 이후 재기했지만 3당 합당과 DJP 연합을 통해 김영삼, 김대중 정권을 탄생시킨 ‘킹 메이커’ 역할에 만족했다. 이 때문에 그는 ‘영원한 2인자’로 불리기도 했다. 김총재에 대한 시각은 엇갈린다. 근대화의 기수이자 멋을 아는 정치인(김총재는 그림과 글씨에 일가견이 있다)이라는 긍정적 평가와 ‘처세의 달인’ ‘시대 흐름을 읽지 못한, 지역주의 정치인’이라는 비판이 공존한다.
김총재는 다음주쯤 일본을 찾아 휴식을 취할 것으로 알려졌다. 구름의 자유로움을 좋아해 지은 아호 ‘운정(雲庭)’처럼, 슬슬 구름의 뜰에서 여생을 보낼 채비를 하고 있는 듯 보인다.

4·15 총선 사라진 것들…꼬리감춘 돈‘고무신과 막걸리가 사라졌다.’ 60년대 이후 각종 선거 때만 되면 고무신과 막걸리, 선심 관광과 뒷돈 등으로 분탕질을 쳤다. 하도 이런 것이 기승을 부려 ‘돈은 받되, 선택은 잘하자’는 구호까지 등장했었다. 그러나 올 선거에서는 이런 것들을 전혀 볼 수 없었다.
이는 이번 총선에서 선거법과 정치자금법·정당법이 시행되면서 선거풍토가 완전히 바뀌었기 때문이다. 우선 돈 선거, 조직 선거가 과거에 비해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지구당제도가 폐지된 데다 선거범죄신고포상금 최고 5,000만원, 금품과 향응을 제공받은 유권자에 대한 50배 과태료 부과라는 새 제도 도입이 크게 기여했다는 평가다.
물론 선거전이 본격화되기 전 당내 경선 과정과 선거 막판에 일부 금품과 음식물 제공이 기승을 부리기도 했지만 과거에 비해서는 상당 정도 개선된 것만은 분명하다. 선거법 위반 적발건수는 지난 2000년 16대 총선에 비해 2배 이상 늘어났으나 이는 선거법 단속기준이 강화되고 그동안 음성적으로 비밀리에 이뤄졌던 각종 불법선거가 드러났기 때문인 것으로 분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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