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명가의 초상: 무위당 장일순’

김상표_혁명가의 초상-무위당(I-20)_캔버스에 유채_162.2×130.3cm_2020

[시사매거진](사)무위당사람들의 초청으로 원주 치악예술관에서 무위당 장일순의 관념과 실천의 모험을 기리는 전시회(6월 4일-9일)를 개최하는 경상국립대학교 김상표 명예교수를 작업실 겸 연구실인 Galley Parrhesia에서 만나 이번 전시회에 얽힌 여러 인연들에 대해 얘기를 나눴다. 

 김상표_혁명가의 초상-무위당(I-21)_캔버스에 유채_162.2×130.3cm_2020

사회운동가이자 생명사상가인 무위당 장일순 선생님과는 어떻게 인연을 맺게 되었는가?

“아쉽게도 생전에 무위당 장일순 선생님을 뵌 적은 없다. 그분의 존재를 알게 된 것은 박사과정에서 역설의 논리를 경영의 세계에 끌어들이는 주제로 논문을 쓰기 시작할 무렵이다. 알다시피 道可道非常道로 시작하는 도덕경은 81장 전체가 온통 역설 투성이다. 그런데 어떤 해설서를 읽어봐도, 도덕경에서 얘기하는 궁극의 깨달음 - 함이 없는 함(爲無爲) -, 이 역설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다가 무위당 선생님이 평생 남기신 단 한 권의 책 『무위당 장일순의 노자 이야기(이아무개가 대담하고 정리, 삼인출판사)』를 읽고 어리석은 내가 도덕경에 다가갈 수 있는 길을 찾게 되었다. ‘사사로운 욕망을 버리고 만물과 하나되고자 하는 수동적 적극성의 삶’이 바로 ‘함이 없는 함’임을 가르쳐 주셨다.”

김상표_혁명가의 초상-무위당(I-15)_캔버스에 유채_162.2×130.3cmcm_2019
김상표_혁명가의 초상-무위당(I-17)_캔버스에 유채_162.2×130.3cm_2019

본인의 저서(김영진과 공저) 『화이트헤드와 들뢰즈의 경영철학』을 무위당 장일순 선생님께 헌정한 것으로 알고 있다. 그 책에서의 주장과 무위당 장일순 사상과의 공통점이 있는가?

“나는 『화이트헤드와 들뢰즈의 경영철학』에서 과정공동체(Process Community)라는 새로운 개념을 도출하고 그 실현조건들을 추적했다. 그 책에서 과정공동체를 구현하기 위해서 조직구성원들이 다섯 가지의 관념, 즉 ‘진리’, ‘아름다움’, ‘모험’, ‘예술’, ‘평화’에 참여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중에서 평화가 무위당 사상의 핵심인 생명사상에 다름아니다. 무위당 선생님의 평화 사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내어줌’, 즉 하심(下心)이다.  무위당 선생님은 나를 타인에게 내어주는 것이 평화라고 본다. 큰 평화는 내가 내 것을 독점하는 것이 아니라 내 것을 내어주는 데서 이루어지는 법이다. 대립하고 배척했던 것을 긍정하면서 그마저 조화의 범주 안으로 끌어들이는 것이 진정으로 평화를 이루는 방법이지 않겠는가? 무위당 선생님은 우리가 적으로, 나쁜 것으로, 타자로 규정했던 것을 품어내지 못하면 평화를 이룰 수 없다고 말씀하셨다. 불행히도 이 시대는 신자유주의 사고가 만연하면서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만이 남았다. 심지어 우리 사회는 이런 것들을 혁신이라고 생각하는 경향마저 있다. 이 시대의 문명과 혁신은 책에서도 주장했듯이 ‘진리’, ‘아름다움’, ‘모험’, ‘예술’, ‘평화’의 가치를 추구할 때만 가능하다. 이 다섯 가지 관념을 실천으로 감행한 분이 바로 장일순 선생님이다.”

김상표_혁명가의 초상-무위당(I-22)_캔버스에 유채_162.2×130.3cm_2021
김상표_이인숙_캔버스에 유채_162.2×130.3cm_2021

앞으로 여러 혁명가들을 초상 시리즈로 담아내려는 계획을 갖고 있다고 들었다. 수많은 혁명가들 중 굳이 무위당 장일순 선생님을 첫 번째로 다룬 특별한 이유가 있는가?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혁명가라고 하면 총칼을 들고 기존 질서와 체제를 전복하거나 권력을 탈취하는 거칠고 강인한 모습을 떠올리는데, 진정한 혁명가는 다른 사람의 삶을 바꾸고, 인류의 삶의 조건을 바꾸는 사람이다. 여기에는 물론 현재에 머무르지 않고 자신의 삶을 보다 혁명적으로 사는 것도 포함된다. 무위당 선생님은 자기 자신의 삶뿐만 아니라 인류의 삶을 변화시키기 위해 부단히 노력한 분이지 않은가? 관념의 모험에 그치고 마는 대부분의 지식인들과는 달리, 당신은 모든 생명을 살리고 주변 사람들과 함께 공동체를 아름답게 가꾸는 실천적 삶을 사셨다. 이런 점에서 무위당 선생님을 진정한 ‘삶의 혁명가’ 라고 부르고 싶다. 한마디로 푸코가 말한 ‘아스케시스(자기수양)’와 ‘파레시아(진리말하기)’가 하나로 통일된 아름다운 삶을 몸소 보여주신 분이 무위당 선생님이다. 그림을 그리면서 역사와 시대를 바꾼 ‘혁명가의 초상’을 그려야겠다는 생각을 늘 갖고 있었는데, 이런 이유로 그 첫 번째 인물로 무위당 선생님을 선택한 것이다.”

김상표_묻혀서 사는 이의 고운 마음을_캔버스에 유채_193.9×130.3cm_2021
 김상표_아는 이 있을까_캔버스에 유채_193.9×130.3cm_2021

무위당 27주기 생명협동문화제의 일환으로 개최되는 이번 8회 개인전에서는 어떤 작품들을 전시하는가?  

이번 전시는 22점의 무위당 장일순 선생님의 초상화들을 비롯하여 사모님인 이인숙님, 구원, 미륵자화상-COVID19, 얼굴 등 총 43점으로 구성된다. 먼저 무위당 장일순 선생님 초상화에는 포근하고 따스한 성자 같은 얼굴부터 심지가 굳고 변혁을 꿈꾸는 혁명가적 얼굴까지 당신의 다양한 모습이 담겨 있다. 그분의 사실적인 외모를 재현하듯 그리기 보다는 당신의 뜻과 삶의 이미지를 나만의 고유한 아나코 스타일(Anarcho-Style)인 퍼포먼스 방식의 회화로 담아내려고 애썼다. 근데 놓치지 않아야 할 또 하나가 있다. 무위당 선생님은 사회운동가이자 생명사상가이기도 하지만 예술가로서도 조명받을 만큼 훌륭한 서화작품들을 많이 남겼다는 사실이다. 전시되는 11개의 얼굴 그림들에서는 무위당 선생님의 난초 그림에 담긴 뜻을 현대적으로 새롭게 해석해냈다. 무위당 선생님이 난초를 인간의 얼굴처럼 그려서 모든 존재에 깃들인 생명의 의미를 찾으려 했다면, 나는 인간의 얼굴을 난초처럼 그려서 사회의 어떠한 길들임에도 결코 길들여질 수 없는 원초적 생명의 아름다움을 표현했다. 다음으로 미륵자화상-COVID19 3점의 그림에는 내가 너이고 너가 나이기에 우리는 서로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는 상호존재(inter-being)임을 설파하는 무위당 선생님의 뜻을 담아냈다. 자연의 파괴로 인해 인간 공동체의 안위가 위태로운 COVID-19 시대에 모든 존재를 평등하게 여기고 모셔야 한다는 무위당 선생님의 생명사상이 더욱 귀하게 다가온다. 사람들이 생과 사를 넘나드는 COVID-19 시대인 지금 미륵 또한 고통과 아픔 속에 놓여 있을 수밖에 없음을 3점의 그림으로 표현했다. 사모님인 이인숙님의 초상화도 5점 전시된다. 무위당 선생님의 타자를 향한 내어줌의 삶은 사모님의 비소유의 사랑이 있었기에 더욱 빛날 수 있었다. 그래서 그분의 전기 『묻여서 사는 이의 고운 마음을 아는 이 있을까』를 읽고서 동반자로 사셨던 이인숙님의 삶도 따로 조명해보고 싶었다. 소유와 비소유 사이에서, 욕망과 해탈 사이에서 사모님도 늘 흔들리며 견디어내셨을 것이다. 유교적 가부장제 틀에 한계지워진 삶이었다 할지라도 미국의 자연주의자 스콧니어링의 아내 헬렌니어링처럼 그 나름의 주체적 삶을 찾고 살아가셨던 분으로, 그래서 무위당 선생님과 동반자적 혁명가로 자리매김해 보면 어떨까? 사모님을 그릴 때 아마 이런 마음이 있었던 것 같다. 마지막으로 인간의 구원을 다룬 대작 2점도 전시된다. 번뇌로 가득찬 것이 삶이지만 번뇌 속에 구원의 계기도 함께 들어 있지 않은가? 번뇌 즉 해탈이라는 선불교의 주장처럼 말이다. 예수님도 십자가에 못박히는 가장 결정적인 사건이 없었다면 하나님도 사랑도 만나지 못하셨을지 모른다. 나의 고통, 타자의 고통, 우리 모두의 고통, 모든 존재의 고통 … 그 속에서만 나의 깨달음도 싹틀 수 있지 않을까? 무위당 선생님도 매순간 좌절하고 깨지면서 다시 일어나 무위의 위의 삶을 살아가려 애쓰셨을 것이다. 가장 아픈 순간이면 가장 거짓되고 싶은 않은 마음이 들면 난초를 그리시지 않으셨을까? 당신도 세상이 아프지 않았다면 예술가로 살고 싶었을지 모른다. 물론 당신의 삶 전체가 삶의 예술가로서 꽃피운 삶이었지만 말이다. 그런 마음이 든다. 그래서 2점의 구원 그림은 내게 특별한 의미를 담고 있다. 궁극적으로 구도의 예술을 통해 구원에 이르고자 하는 나의 반시대적 몽상가로서의 꿈이 담겨 있는 그림들이다. 

김상표_구원1_캔버스에 유채_162.2×390.9cm_2021
김상표_구원2_캔버스에 유채_193.9×521.2cm_2021

앞으로도 무위당 장일순 선생님의 삶을 계속해서 회화적으로 형상화할 계획이 있는가? 

나의 그리기 방식이 구상보다는 점점 추상에 가까워지고 있어서 이번 전시회를 준비하는데 곤혹스러운 면이 있었다. 최근에는 표현된 인물이 누구라고 특정할 수 없을 정도로 형태가 해체되어 가는 그림이 그려지고 있기 때문이다. 화가로서 진화해가는 과정에서 당연히 겪게 되는 변화인 듯하다. 그렇더라도 기회가 된다면 동시대에 무위당 장일순 선생님과 희로애락을 함께 했던 분들의 삶도 같이 조명해 보고 싶다. 원주를 민주화의 성지로 만드셨던 지학순 주교님은 물론이고 대학시절에 내가 사상의 은혜를 입었던 이영희 선생님이나 무위당 선생님의 생명사상을 이어받으신 김종철 선생님 등의 삶도 함께 조명하는 전시회를 열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수행성으로서의 화가-되기를 반복하는 과정에서 내 삶의 경계가 흔들릴 때마다 다짐의 표식으로 틈틈이 그분들을 그리고 그것들을 모아서 여기 치악예술관에서 다시 한번 전시를 해보고 싶다. 무위당 장일순 선생님의 관념과 실천의 모험을 기리는 이번 전시회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당신의 뜻과 삶을 깊이 들여다 보면서 나를 성찰하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무위당 27주기 생명협동문화제에 초대해주신 (사)무위당사람들에게 감사드린다. 

 김상표_사랑예찬-무위당 부부_캔버스에 유채_130.3×193.9cm_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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