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현희 시인
안현희 시인

[시사매거진301호] 해외 수주를 위해 영어번역 서류를 공증받으러 지하철을 타고 서울 시내를 관통해 가산디지털단지역으로 향한다. 맞은 편 승객의 손에 들려 있는 루쉰의 <아Q정전(阿Q正傳)>에 시선이 꽂히며 ‘아직도 이런 책을 읽는 사람이 있는가?’라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1921년 발표한 중국 작가의 단편 소설을 1980년대 필독서로 권장해서 많은 청소년이 너나없이 읽었던 기억이 난다.

중국의 한 작은 시골 마을에서 날품팔이로 생계를 잇는 ‘아큐’는 동네 건달들에게 놀림을 받고 이유 없이 무참하게 몰매를 맞으면서도 자신만의 독특한 정신승리법으로 상황을 합리화해나간다. 그는 “나는 아들한테 맞는 격이다. 아들뻘 되는 녀석과 싸울 필요가 없으니, 나는 정신적으로 패배하지 않은 것이다”라고 자기 최면을 걸며 수모를 이겨나간다.

하지만 근거 없는 자부심과 약자를 서슴지 않고 괴롭히는 기연파경의 행동, 더 나아가 뼛속까지 유전된 노예근성 등으로 인해 억울한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혔다가 결국 사형을 당하게 된다. 이러한 그를 당대의 어느 사람도 동정하거나 연민을 갖지 않았다.

작가 루쉰은 <신해혁명>을 경험하며 전통 사회 중국인의 굳어버린 타성을 신랄하게 비판하고 인민 개혁을 바라는 뜻으로 소설을 썼다. 중국 민주주의 혁명을 통해 봉건적인 사회와 더불어 지방 토호의 가족 사이에 벌어지는 권력과 혁명의 그림자를 덤덤하게 희화화했다.

그러한 중국 소설이 ‘100년’의 시간을 지나 현재 우리 사회에서 다시 읽히는 것은 왜일까. 지난 2023년 4월, 워싱턴선언(Washington Declaration) 당시 ‘바이든-날리면’을 정점으로, 연이어 터지는 ‘친구 염탐설’에 대해 “일반적으로 친구끼리는 그럴 수는 없지만, 국가 간 관계에서는 서로 ... 안 된다고 할 수는 없는 것 아니겠나. 현실적으로 ... 가장 중요한 것은 신뢰다. 신뢰가 있으면 흔들리지 않는다”라고 강조한 대통령의 발언이 유언비어나 가짜뉴스처럼 공공연히 회자되고 있는 일련의 헤프닝 때문일까.

“한미 양국의 미래세대는 또 다른 70년을 이어갈 한미동맹으로부터 무한한 혜택을 받을 것”이라는 둥, 김태효 국가안보실 1차장의 “워싱턴선언으로 ... 미국과 핵을 공유하는 것처럼 느끼게 될 것”이라는 둥, “선거 때도 지지율은 별로 유념하지 않았다 ... 제(윤석열)가 하는 일은 국민을 위해 하는 일. 오로지 국민만 생각하고 열심히 해야 한다는 마음만 가지고 있다”라는 둥, “그간 얼어붙은 ... 한일관계를 조속히 회복 발전시켜 ... 우리가 통 큰 결단을 내린 만큼 이번엔 방한하는 일본 총리가 물컵의 나머지 반을 채워야 한다”는 둥 아무 데나 쏘아댄 말의 화살들이 과녁을 벗어나 허공에서 쏟아지는 현실이다. 아큐의 ‘독특한 정신승리법’처럼 엉뚱한 발언과 해석의 발상들이 연거푸 실소를 자아낸다.

김영민 사상사 연구자이자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는 <인생의 허무를 어떻게 할 것인가>에서 ‘정신승리는 가성비가 좋지만, 현실승리는 아니다’고 분석하며, 결국 ‘정신승리는 자기가 자기에게 하는 가스라이팅(gaslighting)이다’고 덧붙인다. 따라서 고통스러운 현실일지언정 마침내 그 불편한 현실을 인지하고 수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현실을 여러 관점에서 볼 수 있는 마음의 탄력을 갖는 것이 진정한 정신승리다(p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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