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반 학술적 연구와 교육, 홍보 활동 적극 추진

[시사매거진303호] 한국인이 가장 존경하는 위인 부동의 1위 이순신. 많은 이들이 그의 일생과 업적을 높게 여긴다. 그런데 정작 인간 이순신에 대해 얼마나 깊게 알고 있을까. 동국대학교 여해연구소(이하 여해연구소) 이인재 이사장은 모르고 보는 것과 알고 보는 것은 천지차이라고 확언한다. 그리고 이는 이순신과도 일맥상통한다.

'이순신 덕후'로 유명한 여해연구소 이인재 이사장.(사진_여해연구소)
'이순신 덕후'로 유명한 여해연구소 이인재 이사장.(사진_여해연구소)

여해연구소 이인재 이사장이 대중들에게 물었다.

"여러분은 왜 이순신을 존경합니까?"

한산대첩, 명량해전, 노량대첩… 단순히 3대 대첩에서 승리한 무인이어서는 결코 아닐 터. 이순신은 뛰어난 무예실력뿐만 아니라 문예창작 실력에도 출중했다. 23편의 시를 쓴 시인이기도 했다. 만약 이순신이 없었다면, 어쩌면 지금의 대한민국은 보존되지 못했을 수도 있다.

'이순신 덕후'로 유명한 이인재 이사장은 수박 겉핥기식 지식에서 벗어나 위인, 그리고 인물 이순신에 대해 깊게 알아볼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다.

이를 실현화하기 위해 여러 연구 활동을 지속해 왔고, 그 결과를 토대로 대중들과 함께 공감하고자 했다. 그래서 학술세미나를 비롯해 이순신웹툰을 제작하고, 이순신골든벨을 포함한 이순신역사유적탐방, 송년음악회, 이순신관련 연극 '남해달빛 ' 등을 개최하며 다방면에서 애를 써왔다. 이는 여해연구소가 생긴지 3년 만에 이뤄낸 괄목할만한 성과이기도 하다. 그토록 바라던 이순신 대중화에 한발 짝 더 다가간 셈이다.

다음은 여해연구소 이인재 이사장과 나눈 일문일답이다.

여해연구소란 명칭이 생소한 사람도 많다.

연구소, 재단은 익숙한 단어다. 반면 여해(汝諧)라는 명칭이 붙은 곳은 유일무이하게 이곳뿐이다. 여해(汝諧)는 이순신의 자다.

많은 이들이 반문한다. 충무연구소라고 하면 이해하기 수월하지 않겠느냐고. 충무는 다른 훌륭한 위인도 많을뿐더러 반복적으로 여해연구소라는 명칭을 소개함으로써 '여해' 대중화에 기여할 수 있다고 판단해 어렵더라도 충무라는 명칭 대신 여해라는 단어를 사용하게 됐다.

과거에는 문인에 비해 무인은 자나 호를 가진 이가 드물었고 문인보다 격이 떨어진다고 평했다. 이순신이 우리나라 역사는 물론 나아가 동양사, 세계사에서 저평가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문무는 상하가 없고 똑같이 존중하는 태도와 예우를 갖춰야 한다.

여해연구소는 이순신 대중화를 위해 학술세미나를 비롯해 이순신웹툰을 제작하고, 이순신골든벨을 포함한 이순신역사유적탐방, 송년음악회 등을 개최하며 다방면에서 애를 써왔다.(사진_여해연구소)
여해연구소는 이순신 대중화를 위해 학술세미나를 비롯해 이순신웹툰을 제작하고, 이순신골든벨을 포함한 이순신역사유적탐방, 송년음악회 등을 개최하며 다방면에서 애를 써왔다.(사진_여해연구소)

이순신의 대중화, 현실에서 가능하리라 보는가.

지금 현재는 태평양에 돌멩이를 던지는 격이라고 비유하고 있다.

그런데, 여해연구소는 하루 이틀하고 그만두거나 멈출 연구소가 아니다. 영구히 운영되도록 설립됐으며 나름대로 단계별 계획을 철저히 세워놓은 상태다.

지금 진행하고 있는 프로그램들은 체계적으로 업그레이드 시켜나갈 것이며 향후 이순신 마라톤 개최를 희망하고 있다. 이는 단순히 꿈만 꾸는 것이 아니라 실질적으로 현재 거제시와 활발하게 타진 중에 있다. 아울러 이순신탄생 500주년 되는 해인 2045년 세종문화회관에서는 뮤지컬 '남해의 달빛' 공연을 올릴 예정이다. 많은 관심 부탁드린다.

시도해보지 못했던 연구 사업이 있다면.

우리끼리 이순신 훌륭하다, 멋지다, 좋다한들 이순신의 위대함을 알리는데 한계가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나라 오천만 명 중에서 하다못해 오만 명이라도 알아야 한다.

지금은 케이컬쳐(K-Culture) 시대다. 한국어 배우기 열풍 시대가 온 만큼 교육기관과 연계해 한국어로 우리역사를 가르치면 어떨까 싶다. 이순신을 비롯해 어느 나라에나 영웅이 존재하는데, 이순신의 일생과 업적을 한국어로 수업해 한국에 이런 훌륭한 영웅이 있었다는 것을 세계인에게 알리고 싶다. 이외에도 다양한 홍보활동을 하고 싶다. 만화를 제작하고 유튜브 활동을 하는 것도 그러한 일환이다. 아직은 초창기다. 앞서 언급한바와 같이 태평양에서 돌멩이를 던지고 있지만, 그 돌멩이의 울림이 언젠가는 반드시 커질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여해연구소 이인재 이사장이 직접 기획하고 제작한 이순신 웹툰.(사진_여해연구소)
여해연구소 이인재 이사장이 직접 기획하고 제작한 이순신 웹툰.(사진_여해연구소)

우리나라의 가장 위대한 문화유산은 이순신이라고 말했다.

근본은 이순신의 실체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인기 많고 유명한 위인으로 꼽히지만 정작 실체를 모르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 단순히 한산도대첩을 치르고 옥포대첩에서 승리한 인물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전투를 통해서 우리나라가 세계지도에서 사라질 뻔한 위기를 막았다는 게 중요한 포인트다. 단편적인 부분만 볼 것이 아니라 더 넓은 시각에서 바라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일례로 이순신은 중국(당시 명나라)까지도 지켜준 장본인이다. 그 당시 우리나라가 제대로 일본 침략을 막아내지 못했다면 중국의 안전성도 보장할 수 없었다. 사실상 조선과 일본 전쟁은 일본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중국과 천축조국(인도)을 포함한 아시아 정복을 목표로 한 대동아전쟁의 서막이었다. 이 전쟁의 서막인 제 1단계에서 조선은 엄청난 피해를 입으면서도 일본의 대륙 진공을 막아 아시아의 평화를 수호했다.

뿐만 아니라 인도를 가기 위해서는 대만, 태국, 미얀마 등 여러 나라들을 지나가야 하는데 결국 중세판 대동아전쟁이 벌어지게 된다. 대동아전쟁이 발발하면 아시아 평화가 깨지는 건 한순간이다. 그것을 미연에 방지한 게 바로 이순신이다. 물론 300년후에 실제로 대동아전쟁이 일어났지만, 역으로 생각하면 이순신이 있었기 때문에 300년 동안 그 전쟁을 막을 수 있었다.

여해연구소는 이렇게 가려진 역사의 배경을 밝히고, 전란을 극복한 이순신과 의병, 민초들의 활약을 재평가함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우리가 알지 못했던 이순신에 대해 흥미로운 이야기가 있다면.

무인으로 알고 있지만 유학을 하고 성리학을 한 위인이 이순신이다. 무려 23편의 시도 썼다. 실제로는 문인이면서 시인이기도 하다.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시는 한산도가다. '한산도 달 밝은 밤에 수루에 올라 큰 칼을 어루만지며 깊은 근심을 할 때 어디서 한가락 강적(羌笛)소리가 더욱 근심을 더하네.' 

당시 상념이 많을 때인데, 바다를 바라보면서 이런 문구를 썼다는 자체가 이순신은 문과 급제자 배출에도 충분히 될 만한 문예 실력을 가지고 있었다고 짐작할 수 있다. 반면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글을 몰랐다.

또 한 가지는 이순신의 여인이다. 구전에 의한 내용을 살펴보면 이순신에게는 내산월이라는 여인이 있었다. 내산월은 한양에서 아주 유명했던 의로운 기녀로 자신의 생각을 담아서 정중하게 편지를 보냈다. 또 거북선을 만드는데 본인이 평생 모은 금괴를 갖다 바치기도 했다.

처음에는 충무공이 감히 기녀를 만날 수 있겠느냐며 거절을 반복한 이순신도 반복되는 편지에 정성이 갸륵하다고 느껴 실제로 기녀 내산월을 만나기도 했다고 난중일기에 기재돼 있다.

'병신년 9월에 내산월이 와서 밤이 깊도록 취했다.' 물론 그 이후의 이야기는 없다.

여해연구소의 다양한 활동을 통해 기대하는 효과는.

연구소의 가장 기본은 학술 연구다. 학술 연구를 주축으로 하되 현재 하고 있는 연구를 통합적으로 할 계획이다. 이순신이 직접 작성한 난중일기만으로 연구를 하는 것에는 분명 한계가 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이순신 혼자만의 이야기이고 일기로 단편적이다.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내용도 있지만 엄밀히 말하자면 그것 역시 어디까지나 조선의 입장에서 기록한 내용이다. 하지만 이것은 국제 전쟁이다. 그리고 조선은 공격하는 입장이 아니라 방어하는 입장이었다. 그렇다면, 전쟁에서 방어하는 입장보다는 침략해서 공격한 입장이 더 많은 준비를 하지 않았을까. 어떠한 동기로 얼마나 어떻게 준비를 했는지, 전쟁이 끝난 후 일본과 중국은 어떠한 상황에 놓이게 됐는지 나아가서 아시아 전체가 놓인 형국에 대해 서로 교류해가면서 심층연구를 해야 할 필요가 있다.

일본과 원만한 교류가 가능하다고 생각하는지.

충분히 가능하다. 모든 일에는 호와 불호가 있듯이 양날의 검과도 같다. 일본 사람도 마찬가지다. 혐한파가 있으면 친한파도 있다. 또 많은 일본인이 잘못한 부분은 받아들이고 인정한다. 실제로 일본에 3년 간 거주한 적이 있는데 이들의 성정이 무조건 배타적이지는 않다.

흥미로운 일화가 있다. 진도 내동마을에 가면 왜덕산이 있다. 왜군들에게 덕을 베풀었다는 뜻에서 붙여진 왜덕산은 진도사람들이 정류재란 때 죽은 일본군의 시신을 거둬 묻어준 곳으로 유명하다. 당시 왜군들이 굉장히 많이 사망했는데 내동마을 앞바다로 일본군의 시신들이 파도에 떠밀려왔고 마을사람들은 일본군이었지만 마냥 모른 척 할 수 없었다. 시신을 마을 앞 산자락에 묻어줬고 햇볕이 잘 들면서도 일본 쪽을 바라볼 수 있도록 했다.

'우리 할아버지 여기서 돌아가셨다'며 지금도 일본 사람들이 종종 찾아온다. 대부분의 일본인이 과거사를 모르기에 한국에 사죄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여해연구소가 해야 할 일이 많다. 과거 역사를 올바르게 알리는 것이 그만큼 중요하고 이를 위해 우리는 연구하고 또 연구해야 한다.

곧 여든을 앞두고 있는 나이.

어깨에 실린 책임감들이 제법 무겁게 느껴질 때도 있다.

아무도 주목하지 않더라도 누군가는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이다.

이인재 이사장이 없다고, 또 함께 하는 동료가 없다고 해서 여해연구소가 할 일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누군가는 계속 할 것이며, 그렇게 해서 이어나가야 한다. 이순신을 살리는 것이 대한민국을 살리고 대한민국의 국격을 살리는 길이므로.

설령 빛이 없는 곳일지언정 지금 여해연구소가 남긴 기록은 훗날 후손들이 기억할 것을 알기에 조선의 이순신이 그랬던 것처럼. 묵묵히 우리는 우리의 길을 갈 줄 알아야 한다.

dlghsdldirl@sisamagazine.co.kr 박희남 기자

새시대 새언론 시사매거진

저작권자 © 시사매거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